Pianist Hyeyoung Song

June 14, 2008

[1.12.2008] A Letter for You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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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대에게 띄우는 음악편지  
송혜영의 [음악의 날개 위에]

– 사랑하는 선에게

새해를 맞는 아침, 남편은 내게 짧은 연주를 부탁했다. 소박한 둘만의 연주회를 마치면서 나는 한 해를 아름다운 음악으로 시작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새삼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음악과 함께 하는 삶을 살게 해 달라고 기도했던 나의 십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래서였을까. 그 아침, 곧 열 여섯이 된다고 눈을 반짝거리며 웃던 네 생각에 오래 잠겼던 것은….

새해에 나는 훌륭한 음악회를 많이 찾아 다니는 네 모습을 꿈꾼다. 우리 주면을 조금만 둘러 보면 언제든지 좋은 음악회들의 소식을 들을 수 있다. 올 1월에 있을 안드레 와츠와 3월 랑랑, 4월 개릭 올슨과 안네 소피 폰 오터와 같은 유명 음악가들의 공연도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달라스 마이어슨 센터와 포트워스의 배스홀, 시립 오케스트라와 아트홀, 미술관과 공원, 그리고 여러 음악대학들의 홈페이지를 방문해 보면 다양한 공연 정보를 직접 얻을 수 있다. 음악은 언제나 가까운 곳에서 들어 줄 이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과, 직접 찾는 자들에게 그것을 향유하는 온전한 특권이 주어진다는 것을 네가 몸소 알아가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한다.

새해에는 평생 함께 하고픈 친구를 사귀듯 좋은 음반들을 네 곁에 많이 두도록 하여라. 바하의 첼로 무반주 조곡을 연주하는 거장 파블로 카잘스의 숨결로부터 음악이 인간에게 주는 순전한 위안을 네가 누려 보았으면 좋겠다.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하는 에프게니 키신이 고작 열 두살 소년이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신은 불공평하다고 입을 삐죽거릴지도 모를 네 모습은 또 얼마나 사랑스러울까.

비 내린 오후 청명한 햇살에 비치는 물방울을 응시하는 너의 창가에 클라라 하스킬의 모짜르트가 들렸으면, 가끔씩 아무도 몰래 깊은 슬픔의 심연속으로 침잠하고플 때 차이코프스키가 널 홀로 외롭게 하지 않았으면 한다. 진실된 친구 한 사람이 우리 인생에 가지는 의미와 같이, 십대 때 이루어진 한 장의 명반과의 만남은 그 사람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기도 한단다.

또 새해에는 비단 음악회나 음반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네 삶이 음악으로 가득 차길 바란다. 우리는 종종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혹은 책을 읽거나 미술 작품을 감상하면서 음악을 경험하기도 한다. 헤르만 헤세나 발자크의 소설을 읽다가 아마 쇼팽의 멜로디를 듣게 될지도 모른다. 만약 단테의 신곡이나 괴테의 파우스트를 읽었다면 리스트의 음악이 새롭게 이해되는 것을 경험할 것이다.

모네의 작품 속에 드비시가 황홀하게 펼쳐지고, 칸딘스키의 작품 속에 복잡한 쇤베르그의 음악이 형상화되는 순간을 너는 사랑하게 될 것이다. 신이 만든 모든 창조물과 인간의 예술작품 속에 존재하는 음악, 그것을 삶 속에서 깊히 경험하는 것만큼 즐겁고 값진 일이 또 있을까.  

마지막으로 새해에는 더 열심히 음악을 배우고 더 많이 나누기를 당부한다. 음악을 제대로 배운다는 것은 우리의 시간과 열정을 온전히 음악에 바치는 것을 의미한다. 음악의 아름다움에 사로잡혀 치열하게 고민하고 소중한 땀방울을 흘려본 이라면 어느 새 그의 삶도 아름답게 가꾸는 법을 체득하게 되리라. 내게는 어렸을 적 어머니가 흥얼거리시던 슈베르트가, 선생님이 부르시던 멘델스죤이 지금도 생생하다.

불꺼진 음악실에 모여 매일같이 음악회를 열던 여고시절, 친구들과 함께 나누었던 음악의 순수한 떨림은 나이든 내 가슴에 다시는 같은 모습으로 찾아 오지 않을런 지도 모른다. 한 사람이 음악을 사랑하게 되기까지는 반드시 함께 음악을 나누어 준 고마운 이들이 있다. 그리고 나는 네가 누군가에게 바로 그 고마운 사람이 되어 줄 수 있으리라 믿는다.

사랑하는 선아! 음악이 얼마나 네 영혼을 맑게 채색하고 생을 더없이 풍성하게 만들어 줄 지 생각만 하여도 나는 벌써 가슴이 뛴다.

‘그대 아름답고 즐거운 예술이여!/ 마음이 울적하고 어두울 때/ 그 아름다운 멜로디를 듣고 있으면/ 언제나 즐거운 기운 솟아나/ 마음의 방황 사라집니다./ 누구의 멜로디일까요./ 꿈결 같은 그 멜로디에/ 내 마음 어느덧 불타는 정열의 나라로 들어 갑니다./ 때로는 그대 하프에서 한숨이 흘러 나오고/ 때로는 그대의 달콤하고 성스러운 화음이/ 더 좋은 시절의 하늘을 내게 열어 보여 주었습니다./ 그대 아름다운 예술이여!/ 나는 그대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그대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먼 훗날 드려질 네 삶의 진정한 고백이 슈베르트의 노래와 함께 어우러 진다면…. 새해 아침, 나는 그렇게 행복한 네 꿈을 꾼다.

  http://www.thekonet.com/news/articleView.html?idxno=3896

 

 

[12.7.2007] Chopin’s Piano Les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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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의 피아노 레슨  
[음악의 날개 위에]

2007년 12월 07일 (금) 11:54:33 송혜영  www.hyeyoungsong.com  

    
    ▲ 쇼팽  
  
폴란드 태생의 프레데릭 쇼팽(Frederic Chopin, 1810-1849)은 19세기가 낳은 위대한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이다. 그의 제자들의 증언에 기초하여 쓰인 책 ‘Chopin : Pianist and Teacher : as seen by his Pupils’ 는 교육자로서의 쇼팽의 면모를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피아노의 시인’ 쇼팽은 과연 어떤 선생이었을까? 그의 레슨실을 노크해 보자.

교육자 쇼팽

쇼팽에게 가르치는 일은 작곡과 함께 그의 서른아홉 해의 삶에서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한다. 그는 교육의 중요성과 선생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잘 인지하고 있었다. 꾸준히 작곡활동을 하면서도 그는 매일 이른 아침에서 오후의 반나절을 평균 하루에 다섯 명 정도의 문하생을 가르치는데 사용했다.

쇼팽은 항상 정확한 시간에 단정한 차림으로 나타나 레슨을 시작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어린이나 초보자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 쇼팽에게 배우게  되기까지는 아주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일단 받아들인 학생과 그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까지 함께 나눌 정도로 가까웠다.

쇼팽은 학생들의 개인적, 음악적, 기술적 문제들에 대한 인격적 이해와 신뢰관계를 중요하게 여겼다. 그는 학생들의 자신감을 북돋아 주는 방법과 적절한 때를 잘 알고 있었다. 학생의 심리적 상태를 꿰뚫어 보는 통찰력을 지닌 그는 “너 자신이 되어라. 네가 느끼는 대로 자신을 표현하라. 나는 전적으로 무엇이든지 네가 하길 원하는 것을 신뢰한다. 스스로 만든 이상을 자유롭게 따르라.”는 말들로 필요할 때마다 그들을 격려했다.

이러한 진심어린 격려는 학생들로 하여금 표현의 기쁨과 예술적 자유를 충분히 경험하도록 만들었다.  
또 그 자신이 훌륭한 피아니스트였던 쇼팽은 학생의 어깨 뒤에서 설명하는 것 뿐 아니라 곡의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 연주해 주기도 했다. 그것을 본 제자들은 쇼팽보다 완전하고 위대한 피아니스트는 없을 것이라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학생들이 스스로 곡을 분석하고 작품의 분위기를 정하도록 유도했다. 이렇듯 철저한 직업정신과 교육적 혜안을 지닌 쇼팽의 교육자로서의 명성은 전 유럽과 러시아에 널리 퍼졌다.    

쇼팽의 가르침

쇼팽은 학생들이 암보로 연주하는 것보다 정확하게 악보를 보고 연주하도록 권장했다. 빈틈없이 실수와 잘못을 지적해 내느라 종종 두 세 마디를 완성시키기 위해 한 시간을 보내는 일도 허다했다. 특히 그는 손가락 번호에 대해 무척 엄격하였다.

학생들에게 손가락 번호를 한 번에 제대로 익혀서 다시는 바꾸는 일이 없도록 가르쳤다. 또 쇼팽은 손가락이나 손목만으로 연주하던 동시대 다른 음악가들과 달리 팔 전체를 이용하는 테크닉을 강조했다. 그는 항상 천천히 부드럽게 꽉 찬 톤으로 연습하길 요구했다. 그는 “마치 벨벳 손으로 건반을 쓰다듬듯 해야 한다. 건반을 때리지 말고 느껴라”라고 종종 말했다.

실제 레슨에서 쇼팽이 무엇보다도 강조했던 것은 듣는 훈련을 통해 귀를 정제시키고 근육의 조절과 이완을 돕는 정신적 연습이었다. 쇼팽의 유일한 피아노 선생이었던 지브니(Zywny)는 바이올리니스트였고 사실상 그 자신은 독학으로 피아노를 배운 셈이었다. 그래서 그는 누구보다도 연습에 있어서 손가락의 기계적 반복을 경계했다.

듣기와 터치의 섬세함을 발굴하는 것은 항상 그의 첫 레슨의 중대한 목적이었다. 그는 학생들에게 오래 연습하지 말라고 말하곤 했다. 오히려 양서를 읽고 미술 작품을 감상하거나 산책할 것을 권했다. 쇼팽의 교수법에서 테크닉은 수단, 그 이상의 것이 아니었기에 기술이나 거대한 울림만으로 뽐내는 연주를 결코 허락하지 않았다.  

제자들의 눈에 비친 쇼팽은 엄격한 가르침과 따뜻한 격려를 적절하게 배합한 투철한 소명감의 선생이었다. 또 연주와 창작에 대한 식지 않는 열정으로 훌륭한 음악가로서의 삶을 몸소 보여준 학생들의 롤모델이자, 불필요한 전통에 얽매이기보다는 새롭고 창조적인 방법으로 개개인의 학생에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발굴한 창조적 교육자였다.

얼마 전 어스틴에서 한 학생의 반가운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수 년 전 내 피아노 레슨을 수강했던 공대생이었다. 지금 대학원 공부 중인 그는 겨울 방학동안 어떤 곡을 연습해 볼까 하고 오랜 만에 피아노 앞에 앉았다가 불현듯 내 생각이 나서 연락을 했다고 한다.

세월이 흐른 후 먼지 쌓인 피아노 뚜껑을 열면서, 우연히 음악을 듣다가 내 얼굴을 떠올릴 수많은 그들에게 더 나은 선생이고 싶다는 열망으로 오늘 나는 오래된 쇼팽의 레슨실을 나선다.  

http://www.thekonet.com/news/articleView.html?idxno=3686

 

 

[11.3.2007]The Pianists in New York C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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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 맺어준 만남  
[송혜영의 음악의 날개위에] 뉴욕 여행에서 만난 피아니스트들

2007년 11월 03일 (토) 01:09:13 송혜영  www.hyeyoungsong.com  

지난 주 나는 개인적인 중요한 행사를 위해 뉴욕을 다녀왔다. 거대한 도시 문명 깊숙이 흐르는 정신적 물줄기를 찾아 거닐다 나는 감사하게도 많은 아름다운 영혼들과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과 내가 있던 그 곳에는 언제나 음악이 함께 있었다.

호세  멘데즈(Jose Ramon Mendez)

     
    ▲ 호세 멘데즈(Jose Ramon Mendez)  
  
뉴욕에서의 이튿날, 친애하는 스승이자 좋은 음악적 동지인 피아니스트 호세 멘데즈 교수와의 재회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UT 어스틴(Austin)에서 실내악 교수와 박사과정 학생으로 만난 우리의 인연은 그가 뉴욕대학(NYU)으로 옮긴 후에도 계속되어 왔던 차였다. 피아니스트 호세 멘데즈는 차세대 스페인 연주가들의 선두주자로 꼽힌다. 유년시절 스페인의 유명한 음악교사인 아버지로부터 배운 그에게 음악은 공기처럼 익숙하고 물과 같이 자연스럽다. 미국 유학시절에는 호로비츠의 제자였던 바이언 재니스(Byron Janis)에게 배우면서 폭넓은 레파토아를 섭렵하였고, 피아노 테크닉을 깨우치기 위해 인체학, 물리학 등 다방면의 학문을 깊이 연구하며 스스로의 이론을 정립해 낸 냉철한 지성가이기도 하다.

그는 오랜만에 보는 우리 부부를 극진히 환대해 주었다. 음악에 대한 진지한 토론과 서로에 대한 진심어린 격려가 오가고, 각자 연주생활에서 겪은 재미난 에피소드를 나누며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몰랐다. 그와 헤어져 돌아오는 길에 나는 머릿속에 “균형”이라는 화두를 떠올렸다. 지성, 감성, 그리고 테크닉의 조화로운 균형감각을 지닌 그의 음악은, 고독한 예술가이자 건강한 생활인으로서의 두 삶을 잘 조율해내는 그와 닮아 있기 때문이다. 바빴던 일상을 떠나 마음이 통하는 이들과 와인잔을 기울이며 실컷 음악 이야기를 풀어내는 동안, 내 삶은 어느새 아름다운 하모니를 연주하고 있었다.  

안드라스 쉬프(Andras Schiff)

     
    ▲ 안드라스 쉬프(Andras Schiff)  
  
카네기 홀에서 피아니스트 안드라스 쉬프의 베에토벤 소나타 전곡 연주 포스터를 보고 내 가슴은 요동쳤다. 헝가리 부다페스트 태생의 피아니스트 안드라스 쉬프의 베에토벤 소나타 전곡 연주는 2004년 유럽에서 먼저 시작되었고, 2009년 음반 녹음을 앞두고 이번 시즌에 북미지역 순회 연주로 열리게 된 것이었다. 기악음악의 신약성서라 불리는 베에토벤 피아노 소나타를 쉬프의 연주로 듣는다는 벅찬 기대감으로 가득 메운 청중들로 인해 카네기 홀은 연주 시작 전부터 술렁거렸다.

쉬프는 작곡가의 의도와 본질에 무서우리만큼 집중하면서 음을 통해 차원의 창조적 재구성을 이루어내고 있었다. 또 고전 소나타의 완벽한 구조와 베에토벤의 혁신적 음악적 요소들의 역설을 통해 작곡가의 심오한 내면세계를 투명하게 드러내 주었다. 그의 학구적인 집중력과 고도의 장인정신은 내게 마치 베에토벤의 그것을 보는 듯 했다. 답례로 연주된 슈베르트 또한 너무나 훌륭해서 청중들은 자리를 뜨지 못하고 열렬한 환호와 갈채를 보냈다. 이틀 후 있을 두 번째 독주회를 놓쳐야 한다는 아쉬움을 남기고 자리를 떠나야 했지만, 그의 음악과 함께 한 시간은 내게 여행지에서 가장 값진 보석을 캔 기쁨이었다.  

레온 플라이셔(Leon Fleisher)

     
    ▲ 레온 플라이셔(Leon Fleisher)  
  
예기치 않은 만남이 있어 여행은 더욱 즐겁다. 쉬프의 연주회의 시작을 기다리던 시간, 내 바로 옆 좌석에 자리를 잡은 노신사는 바로 피아니스트 레온 플라이셔였던 것이다. 천재 음악가로서 성공가도를 달리던 레온 플라이셔는 37세의 나이에 갑자기 근육긴장이상증으로 오른손의 마비가 시작되어 30년 이상 왼손만으로 연주한 불운의 피아니스트였다. 하지만 이에 굴복하지 않고 지휘자로, 교육자로 존경받는 음악가의 반열에 우뚝 선 거장이며 몇 해 전부터는 의학의 도움으로 다시 양손으로 연주활동을 재기 하면서 그는 음악과 삶으로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사실 레온 플라이셔 그 자신은  슈나벨의 제자로서, 베에토벤-체르니-레셰티츠키-슈나벨로 이어지는 계보를 잇고 있다. 나의 스승이신 UT 어스틴의 그레고리 앨런(Gregory Allen) 교수는 바로 레온 플라이셔의 수제자로서, 내가 앨런 선생님과 공부했었다는 이야기를 하자 “너도 내 제자로구나!” 라며 반가움을 숨기지 않았다. 그의 말은 베에토벤의 7세대 째 위치에 내가 서 있음을 새삼 상기시켰다. 터전을 떠나 온 곳에서 내 음악적 뿌리를 다시 만나게 되다니, 그것은 희열이었다.

만남은 아름답다. 여행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꽃 한 송이, 풀 한포기는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번 여행이 그 어느 때보다 풍성했던 것은 바로 음악이 맺어준 만남의 신비 때문이었다. 텍사스에 돌아와 보니 가을이 성큼 다가와 있다. 떠날 때 다시 만나게 되는 인생의 겸허한 진리 앞에 마음을 비우고 이 가을 매일 여행을 연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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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2007]The Nine Stairs to Heaven -The Beethoven Festiv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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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의 날개위에] 천국에 이르는 아홉 계단

-달라스 심포니의 베에토벤 페스티발을 맞이하며

2007년 10월 06일(토) 05:36:51 송혜영  www.hyeyoungsong.com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는 텍사스의 가을, 반가운 소식이 들린다. 바로 달라스 심포니가 베에토벤 페스티발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10월 18일부터 12월 2일까지 다섯 주에 걸쳐 베에토벤의 교향곡 전곡이 연주될 이번 페스티발에서는 네 명의 지휘자가 번갈아가며 연주를 맡는다.

그에 앞서 오는 7일에는 영화 ‘베에토벤의 머리카락(Beethoven’s Hair, 2005)’이 마이어슨 센터에서 먼저 상영될 예정이다. 다큐멘터리 형태의 이 영화는 베에토벤의 사후 남겨진 그의 머리카락에서 일반인보다 100배가 넘는 납성분이 검출되었다는 사실에 기초하여, 그의 정확한 사인을 유추해 보고 청력을 잃은 상태에서 끊임없이 작곡에 몰두했던 작곡가의 인생을 간접 경험하게 하는 래리 와인스타인 감독의 수작이다. 베에토벤을 듣기 전에 그의 인생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하는 달라스 심포니의 사려 깊은 기획력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오, 베에토벤!

모든 음악가가 사랑하고 경외하는 이름 베에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  유년시절부터 삶은 그에게 혹독했다. 그의 아버지는 심각한 알콜중독이었으며 베에토벤은 어려서부터 그의 어머니와 두 남동생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의 위치에 있었다. 젊은 작곡가로서 주목을 받으며 음악에 몰두하던 1795년 그의 청각장애는 시작되었고 1819년에는 완전히 청력을 잃게 된다. 1802년 여름, 청각상실과 동생들과의 불화로 괴로워하던 베에토벤은 비엔나 근교에 머무르면서 남동생 앞으로 그 유명한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를 쓴다.

“완전한 희망을 상실하였을 때 나를 만류했던 것은 오직 예술이었다… 그렇게 되어야 할 일이라면, 나는 기꺼이 죽음을 향해 나아가겠다… 그러나 그래도 나는 만족하리라, 죽음은 나를 끊임없는 고뇌의 상태로부터 해방시켜 주지 않겠느냐? 죽음이 찾아오고 싶을 때 언제든지 찾아와도 좋다. 나는 용감히 너를 맞이하겠다…. 나를 지탱해 온 고결한 용기도 이제는 사라졌다. 오, 신이시여, 단 하루를, 참다운 환희의 하루를 내게 내려 주십시오, 참다운 기쁨의 깊은 울림이 내게서 멀어져 간 지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렀는지… 신이시여, 언제 다시 환희의 날을 맞이할 수 있을까요? 그 날은 영원히 찾아오지 않을까요? 그것은 너무나 가혹합니다.”

유서는 고독하고 비참한 상태에서 예술만이 희망이었음을 고백하면서 이제는 주어진 고통을 받아들이고, 죽음 앞에서 의연할 것과 운명에 굴하지 않으며 용기 있게 맞서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육체적 고통에 의한 고립은 엄청난 내적 상상력으로 보상되었던 것일까. 공기 중에 울리는 소리의 아름다움을 들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그의 마음속에서 훨씬 많은 소리를 그려 낼 수 있었는지 모른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베에토벤의 음악은 보다 원숙한 음악양식을 가지게 된다.

아홉 개의 교향곡

베에토벤은 모두 9개의 교향곡을 남겼는데, 그 중 몇몇은 3번 ‘영웅’, 5번 ‘운명’, 6번 ‘전원’, 9번 ‘합창’이라는 부제로 대중에게 알려져 있다. 1번과 2번은 하이든과 모짜르트의 양식을 많이 따르고 있다. 하지만 3번에서는 이미 베에토벤의 독창적 양식이 완성된 것을 볼 수 있다. 5번은 유명한 오프닝 모티브 덕택에 아마 대중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곡일 것이다. 마지막 9번은 교향곡에 합창이 결합되는 혁신적인 형태를 가졌을 뿐 아니라, 독일의 시인 쉴러(Schiller)의시 ‘Ode to Joy’에 맞춰 부르는 노래에 나타난 용서와 화해의 메세지는 위대한 인류애로 발현되어 감격의 피날레를 완성한다.

베에토벤은 음악에 있어서 탁월한 건축가였다. 구조에 대한 그의 천재적 아이디어들과 기법은 하이든 모짜르트의 고전파 양식을 집대성하여 발전시키게 하였다. 베에토벤은 고전양식의 완성자이자, 옛 것과 새 것을 이어주는 연결자였다. 또한 그는 항상 거침없이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낸 혁신가였으며, 그리하여 낭만음악의 선구자 역할을 한 것으로 음악사에 평가된다.

57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그의 삶은 아침기도와 같이 경건했고 처절한 전사와 같이 치열하였을 것이다. 일전에 피아니스트 백건우씨는 베에토벤을 가리켜 ‘너무나 많은 사랑을 지니고 태어났지만 그 사랑을 표현하지 못했던 사람’이라고 묘사한 것을 읽은 적이 있다. 들을 수 없는 고독한 암흑의 세계에서 그가 펜을 들어 음표를 쏟아내야 했던 것은 말로는 차마 표현하지 못했던 그것, 사랑 때문이었으리라. 모든 악기와 목소리로 생을 긍정하며 형제를 포옹하는 그의 마지막 교향곡에 귀 기울이는 동안 우리는 어디선가 천국의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게 될지 모른다.

http://www.thekonet.com/news/articleView.html?idxno=3181

[8.25.2007] 상실의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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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음악

2007년 08년 25일 (토) 02:30:19          송혜영  www.hyeyoungsong.com

어린 아이들이 슬픈 음악을 얼마나 이해하고 연주할 수 있을까? 천진난만한 그들의 눈망울을 향해 슬픔이라는 감정을 논한다는 것이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일전에 내가 아는 교수님은 한 어린 학생에게 지금까지 겪었던 가장 슬펐던 일을 떠올려 보자고 했고,‘집에서 키우던 강아지가 죽었을 때’라고 대답한 그 아이는 잠시 후 놀랍게도 제 나름의 감정을 실어 연주를 하더라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사랑하던 강아지를 잃은 상실감은 어린 그가 태어나 겪은 가장 큰 슬픔이었던 모양이었다.

예술의 샘, 상실

누구나 끊임없이 상실을 경험하며 살아가듯이 위대한 작곡가들도 예외 없이 상실의 고통을 겪었다. 몇 년 전 체코 작곡가 야나첵에 대해 연구할 시절, 나는 그의 악보만 들여다보아도 금새 눈물이 맺히곤 했었다. 야나첵에게는 병으로 먼저 세상을 떠난 딸 올가가 있었는데 작품 곳곳에 딸을 향한 절절한 그리움이 고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죽음도 끊을 수 없었던 아버지의 사랑은 악보에 새겨져 아름다운 음악으로 세상에 남겨지게 된 것이다.

슈만은 어렸을 때 정신병력을 가진 친어머니와의 떨어져 살면서 애착관계가 결핍되었고, 누나의 자살과 아버지의 죽음으로 평범한 유년시절을 상실했던 사람이었다. 쇼팽은 평생 자신의 육체적 질병과 조국을 잃은 서러움, 실연의 상처 등의 상실감을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냉담한 세상에서 지독한 가난과 질병에 고통 받으며 매일 아침 깊은 절망 속에 눈을 떠야 했던 슈베르트는 결국 자신의 슬픔이 정신을 강하게 하고 슬픔으로 만들어진 작품이 세상을 행복하게 할 것이라고 믿었고, 그리하여 서른 한 해의 짧은 일생을 오로지 아름다운 음악을 작곡하는 데 바쳤다.

베에토벤은 술주정뱅이 아버지의 학대와 상처의 우울한 유년시절을 보냈고, 사랑하는 연인들과 결혼하지 못하는 좌절감을 겪었으며, 무엇보다도 음악가에게 가장 중요한 청각을 잃었다. 작곡가에게 사형선고와도 같은 청각의 상실은 그를 깊은 괴로움과 슬픔 속으로 밀어 넣었고, 1802년 급기야 자살을 생각하고 그 유명한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를 남기기에 이른다. 하지만, 생에 대한 굳건한 의지와 고결한 예술혼으로 다시 일어선 베에토벤은 귀를 통해서가 아니라 영혼으로 들어야 하는 위대한 작품들을 온 인류에게 선물했다. 위대한 작곡가, 그들에게 상실의 바닥은 절망이 아니라 아름다운 예술을 잉태하는 기적의 샘이었던 것이다.

상실의 골짜기에서 울리는 소리

학위를 다 마쳐 갈 즈음 나는 텍사스의 한 교도소에서 수감자들에게 음악을 가르칠 기회가 있었다. 교실에 그들을 위해 주어진 것은 조악한 음향 기기들과 나의 요청으로 구해진 조그만 전자 키보드가 전부였다. 하지만 끔찍한 죄목을 단 그들의 가슴에 작은 선율 하나가 파고들 때마다 그들은 온 몸을 떨며 감동했다. 그들은 한 때 자신의 양심을 돌보지 못한 자들이었고, 사회로부터 혜택보다는 크고 작은 불행을 겪어 온 자들이었다. 대부분은 처참한 환경으로부터 자신의 몸뚱아리를 지키기 위해 싸워온 치열한 생존자들이었으며, 이제 죄값을 대신해 가족과 함께 하는 소박한 저녁시간의 자유조차 잃어버린 자들이었다.

언젠가 수업시간에 쓰인 한 학생의 글을 읽다가 나는 그만 울고 말았다. “음악은 우주와 그 아래 모든 창조물들의 총체적인 결합체입니다. 심지어 별들도 듣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노래를 불러 주니까요. 음악은 ‘진정한’ 사랑입니다. 나는 음악이 나의 아주 큰 부분이길 바랍니다. 음악은 나의 사랑이고 그가 나를 사랑해 주듯이 나도 그를 사랑할 겁니다. 음악은 어떻게 말로 표현하기에는 너무 아름답습니다.”씻을 수 없는 아픔과 상처로 인해 자신의 존재조차 무감각해지고, 외부로 부터 철저히 단절된 상실의 골짜기에서 그들이 들었던 것은 아마도 신의 음성이 아니었을까.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갈수록 녹록치 않다. 하루가 멀다 하고 지구 곳곳에서 들려오는 다툼과 분쟁의 소식에 현대인은 본연의 인간다움을 점점 잃어간다. 예기치 않는 사고와 이해할 수 없는 비극 속에 상실의 고통은 이미 너무 익숙해 진 듯 우리는 모두 귀를 막고 조용히 속울음을 삼키며 산다. 눈부시게 화창한 오후, 이유 없이 날 울리고야 마는 바하의 선율 속에서 날 닮은 한 친구를 만나 살며시 그의 손을 잡는다. 음악이 그대의 눈에 눈물을 흐르게 하기를, 그리고 알게 되기를…. 메마른 뺨을 적시는 우리의 눈물이 뜨겁다는 것을….

http://www.thekonet.com/news/articleView.html?idxno=2682

[8.7.2007]The Opus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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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작품번호 1

2007년 08월 04일 (토) 05:50:56 송혜영  www.hyeyoungsong.com

다른 예술분야와는 달리 음악에서는 대부분의 작품에 구체적 제목 대신 번호가 붙는다. 작품번호를 의미하는 오푸스(Opus, 혹은 줄여서 Op.)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말로서 본래 ‘일’이나 ‘작업’을 의미하는 말이다. 하지만 오푸스 번호가 반드시 작곡한 순서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 작곡가가 붙히는 것이 아니라 출판 당시 출판사에서 붙히는 것이 관행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출판된 순서를 나타내는 것이지만 모든 음악가에게 첫 작품, ‘Opus 1’의 의미는 특별할 것이다. 오늘은 위대한 작곡가들의 유명한 Opus 1들을 소개한다.

로베르트 슈만(1810 –1856)
‘Abegg’ Variations, Op.1

1830년, 부모의 뜻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법학도가 되었던 스무 살의 슈만이 음악가가 되길 결심하고 작곡과 피아노에 열정을 바친다. 그리고 약 1년 후 발표된 ‘아베그 변주곡’은 스무 살의 슈만이 세상에 내 놓은 최초의 작품이 되었다.당시 그의 어머니에게 쓴 편지에는 첫 작품의 출판을 앞두고 기쁨과 기대에 차 들뜬 그의 모습이 담겨있다. 제목 ‘아베그’는 무도회에서 반한 소녀의 이름이라는 설과 가공인물이라는 설이 있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그가‘Abegg’를 a,b,e,g,g라는 다섯 음으로 풀어 곡 전체의 동기로 사용하며 암호놀이를 즐긴다는 것이다. 신선한 주제와 우아한 시정은 첫 작품에 대한 작곡가의 풋풋한 열정과 이미 완성된 독창적인 양식을 보여준다.

요하네스 브람스(1833-1897)
Piano Sonata No.1 in C major, Op.1

브람스의 초기 작품들은 그의 스승이자 든든한 후원자였던 슈만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 주었다. 1853년 슈만은 브람스의 몇몇 작품들을 접하고 1853년 <음악신보>에 “새로운 길”이라는 글을 기고하며 브람스의 천재성을 세상에 소개하였고 브람스는 단숨에 유명한 인물이 될 수 있었다. 슈만의 추천과 도움으로 악보를 출판하기에 이르렀는데, 그 첫 작품이 바로 피아노 소나타 C장조이다. 이 작품 이전에 몇몇 곡들이 더 작곡되었으나 모두 스스로 폐기처분하였고 작곡시기로 보면 다른 소나타보다도 약간 늦게 작곡된 이 곡을Opus 1으로 출판한 것에서 첫 걸음부터 완벽을 추구하고자 했던 신중한 작곡가의 초상을 본다.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1873-1943)
Piano Concerto in F# minor, Op.1


라흐마니노프가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처음 작곡하게 된 것은 그가 모스크바 음악원 학생이던 1890년 즈음이었다. 실제로 가장 먼저 작곡된 작품은 아니지만 이 협주곡으로 인해 그가 작곡가로서 처음 인정받게 되었기에 Opus 1으로 출판되었다. 하지만 스스로 이 곡에 대해 불만족스러웠던 그는 무려 27년이 지난 1917년 철저히 개작하여 다시 출판하였다. 이 때는 이미 그가 피아노 협주곡 2번과 3번을 작곡한 후였고 작곡가로서 전성기를 구가하던 때였기에 원숙하고 완성도 높은 Op.1으로 재창조되었다. 같은 해 가을, 러시아 혁명으로 가족과 함께 핀란드로 망명한 그는 후에 미국에 정착하게 되는데, 그 후 다시는 그리워하던 모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라흐마니노프의 첫 작품인 피아노 협주곡 Op.1은 그가 모국에서 완성한 마지막 곡이 된 것이다.
 

알반 베르그(1885-1935)
Piano Sonata, Op.1

현대음악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쇤베르그, 베번과 함께 신비엔나악파라 불리우는 베르그가 1907년에 작곡한 첫 작품, 피아노 소나타 Op.1는 역사적으로 가장 뛰어난 Op.1 중의 하나라는 평을 받는다. 그가 쇤베르그에게 음악을 배우기 전에는 정규 음악교육을 받은 적이 거의 없다는 점을 감안할 때 가히 놀랄만한 수작이라 일컫지 않을 수 없다. 한 악장으로 이루어진 이 피아노 소나타는 탄탄한 전통적 구조 위에 쇤베르그의 영향을 받은  현대적 기법의 결합을 완성시키며 일관적 주제의 변주와 발전을 이루어낸다. 작곡가의 감출 수 없는 천재성과 스승 쇤베르그에 대한 필연적 경외와 애정이 녹아 있는 작품이다.

내게 작곡가들의 첫 작품들과 대면하는 일은 언제나 흥미롭다. 그것은 마치 소설가나 미술가의 처녀작을 찾아 보는 즐거움에 비유될 수 있을까? 법학도였다가 남보다 뒤늦게 음악의 길에 들어선 후 기대감에 벅찬 슈만의 벅찬 가슴, 열정을 바친 대작을 자신의 이름으로 처음 세상에 내어 놓는 브람스의 떨리는 손끝, 서툴렀던 첫 작품의 완성도를 높히기 위해 몰두했던 고국에서의 시간을 그리워 했을 라흐마니노프의 심장, 역사를 관망하며 새로운 음악어법 탄생의 출발선상에 선 베르그의 꿈꾸는 눈…. 평소 멀게만 느껴지던 천재들의 Opus 1 속에서 우리는 어느 새 함께 울고 웃는 친구가 되어 간다. 고마운 그들의 음악에 경의를 표하며 Opus 1의 오늘을 살자,다시 나를 일으킨다.

http://www.thekonet.com/news/articleView.html?idxno=2505

[7.14.2007]Pianist Van Clibu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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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이름이 된 피아니스트, 반 클라이번

제 13회 차이코프스키 콩쿨 소식을 듣고

2007년 07월 14일 (토) 14:31:18 송혜영  www.hyeyoungsong.com

얼마 전, 러시아에서는 제 13회 국제 차이코프스키 음악 콩쿠르가 막을 내렸다. 세계 최고권위를 자랑하는 이 콩쿠르에서 한국의 임동혁군의 입상 소식을 전하는 언론들은 대부분의 입상자들이 러시아 자국민이라는 것에 대해 아쉬움과 우려 섞인 시선 또한 숨기지 않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달라스 포트워스 지역은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와는 각별한 인연이 있는 곳이라 할 수 있다. 바로 제 1회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우승하여 미국의 살아있는 전설이 된 피아니스트 반 클라이번과 그의 정신을 사랑하고 후원하는 이들이 숨쉬고 활동하는 고장이기 때문이다.

   
 
  ▲ 반 클라이번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와 반 클라이번

반 클라이번(Van Cliburn, 1934~)은 루이지애나 슈리포트 태생으로 여섯 살 때 텍사스 킬고어로 이주해 왔다. 피아니스트 어머니에게 세 살 때부터 정식 피아노 레슨을 받기 시작한 그는 그 다음 해에 첫 독주회를 열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줄리어드 음악원에서 스승 로지나 레바인과 공부하면서 러시아 낭만주의의 전통을 깊이 배울 수 있었고, 이것은 자연스럽게 그를 1958년 제 1회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 출전하도록 이끈 계기가 되었다. 클라이번이 결선에서 연주한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은 현지 청중들의 열렬한 기립박수를 받았으며, 심사위원들은 따뜻한 낭만과 젊은 패기가 어우러진 그의 뛰어난 연주에 1위의 영예를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계 2차대전과 한국전쟁 직후 공산진영인 소련과 자유진영의 미국의 갈등의 골이 깊어만 가던 냉전시대, 스물 세살의 미국 청년이 소련의 콩쿠르에서 우승하였다는 것은 전세계에 많은 것을 시사한 ‘사건’이었다. 1957년 세계 첫 인공위성 스푸트닉호(Sputnik) 발사의 성공으로 한층 고무되어 있던 소련으로서는 이 행사를 통해 자국의 문화적 우수성을 과시하고자 시작부터 단단히 벼르고 있던 차였다.

클라이번의 우승은 당시 열등감과 문제의식에 빠져있던 미국의 문화적 자존심을 크게 높여 주었고, 냉전의 갈등에 메말라 가던 전세계를 향해 음악이 국가간의 사상의 차이나 정치적 구도를 극복할 수 있다는 평화와 희망의 메세지를 던졌다.

또 그가 1958년 콘드라신의 지휘로RCA 빅터 오케스트라와 녹음한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과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은 열광적인 대중의 인기를 끌며 클래식 음반으로서는 처음으로 밀리언셀러의 반열에 올랐고, 타임지는 “러시아를 정복한 텍슨(The Texan Who Conquered Russia)” 이라는 제목으로 그를 표지에 싣는 등 미국인에게 반 클라이번은 음악가 이상의 것을 상징하는 이름이 되었다.

소통과 평화의 가치를 전하며

낭만 피아노 음악의 뛰어난 해석가로 칭송받으며 활발히 활동하던 중 매너리즘에 염증을 느껴 돌연 연주계를 잠적하기도 했던 그는 현재 포트워스에 거주하며 반클라이번 협회(cliburn.org)의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를 사랑하고 후원하는 이 지역 음악애호가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만들어진 이 단체는 국제 음악 콩쿠르 개최, 젊은 음악가와 학생들을 위한 교육과 연주활동 지원, 훌륭한 음악가들을 초청하여 공연을 유치하는 일 등에 바삐 움직이고 있다.

그 중에서도 1962년부터 포트워스에서 4년마다 열리고 있는 반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는 그 명성이 널리 알려진 행사로 성장하였다. 공교롭게도 역사적으로 러시아를 비롯한 많은 동구권 피아니스트들이 이 콩쿠르에서 눈에 띄게 선전하고 있는데, 러시아 본토의 음악이 이 곳에서 연주될 때면 마치 50여년 전 러시아에서 빛나던 클라이번의 영광이 겹쳐지는 듯 텍사스 청중들은 뜨거운 환호성을 감추지 못한다. 이제 반 클라이번은 정치적으로 첨예한 갈등을 빗던 두 국가간의 높은 벽을 허물고 문화적 교류를 가능케 한 이름으로서 사회에 남겨진 몫을 기쁘게 담당하고 있다.

이 지역 음악회장을 찾을 때면 친절한 웃음의 그와 종종 마추치게 될 지 모른다. 그럴 때면 “미스터 클라이번!”하고 반갑게 인사를 건네보는 것도 좋을 일이다. 뜨거운 가슴으로 음악의 힘을 온 세계에 증명하고 역사 속에서 걸어나온 한 음악가와의 만남은 먼 길 달려 음악회를 찾아 온 고단한 발걸음들에게 주어지는 또 하나의 즐거움일 것이다.

 http://www.thekonet.com/news/articleView.html?idxno=2300

[6.30.2007]Where Music Takes Us

Filed under: Column — admin @ 9:31 pm

음악이 데려다 주는 곳

2007년 06월 30일 (토) 05:37:49 송혜영  www.hyeyoungsong.com

달라스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Four Casual Classics Concerts”

뜨거운 텍사스의 여름, 달라스 마이어슨 센터에서는 6월 23일부터 매 주 토요일 7시 30분 달라스 심포니(dallassymphony.com)의 “Four Casual Classics Concerts”가 열린다. 주옥과 같은 명곡이자 대중의 귀에 친숙한 곡들로 이루어진 이번 시리즈에는 클래식 애호가뿐 아니라 일반 대중들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가고자 하는 기획의도가 담겨 있다.

매 회의 프로그램은 6월 23일 독일을 떠나 6월 30일 러시아, 7월 7일 미국을 거쳐, 7월 14 독일로 귀환하는 흥미로운 여정을 따른다. 초보자에게 다소 난해할 수 있는 역사적 배열이 아닌 지역에 따라 음악을 개관할 수 있는 교육적 의미도 있어서, 방학동안 자녀와 함께 부담없이 음악회장을 찾기에도 더 없이 적절한 기회가 될 것이다.

6월 23일 정통 교향악의 세계, 독일

베에토벤: 슈테판 왕 서곡 Op.117
슈만: 교향곡 4번 라 단조Op.120
브람스: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협주곡 Op.102

여행의 출발지는 음악에서 고전파와 낭만파를 통해 유럽의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나라, 독일이다. 대체로 독일음악은 철학의 발전과 더불어 탄탄한 논리적 구조와 강한 내면의 표현력을 가진다. 베에토벤이 고전교향악의 최고 경지를 이룩했다면, 슈만의 교향곡 4번은 형식의 틀에서 자유롭게 벗어나 각 악장이 연이어 연주되는 낭만파의 특징을 나타낸다.

또 슈만의 제자이자 베에토벤의 고전적 형식을 계승한  브람스는 고전과 낭만의 결합을 완성한다. 슈만이 다른 음악가들에게 브람스를 소개하는 자리에서 “여러분, 모자를 벗으시오. 우리 앞에 천재가 나타났습니다.” 라고 말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독일 교향악의 찬란한 정수를 보여줄 이 위대한 세 작곡가 앞에서 누구라도 모자를 벗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6월 30일 광활한 대륙의 애수, 러시아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라 장조Op.35
보로딘: 교향시 <중앙아시아 초원에서>, 교향곡 2번

서구에 가장 널리 알려진 러시아 작곡가라고 평가받는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은 민족적 요소를 취하고 있으면서도 본질적으로는 순수한 낭만성을 지향하고 있다. 그가 남긴 유일한 바이올린 협주곡은 특유의 아름다운 선율과 완벽한 화음의 조화로 언제나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고야 만다. 유명한 화학자이기도 했던 작곡가 보로딘은 러시아와 동양적 색채가 강한 걸작들을 남겼다.

그는 ‘중앙아시아의 초원에서’의 악보에서 “중앙아시아의 단조로운 모래투성이 초원에서 문득 이국적이고 평화로운 러시아의 노래 소리가 들려온다. 멀리서부터 말과 낙타의 말굽소리와 함께 동양의 선율이 들려온다…”라고 동양의 서정을 글로 묘사하기도 하였다.

“러시아와 러시아의 국민성을 알려면 차이코프스키의 <비창 교향곡>과 보로딘의 <제 2교향곡>을 듣는 것으로 충분하다.”라고 했던 오스트리아의 명지휘자 바인가르트너의 말은 이번 연주회가 러시아의 문화를 만끽하기에 놓칠 수 없는 귀한 기회임을 새삼 강조하고 있다.

7월7일 자유로운 영혼의 몸짓, 미국

거쉰: 랩소디 인 블루, 피아노 콘체르토 바장조,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두 번째 랩소디,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I Got Rhythm” 변주곡

이제 거대한 태평양을 건너 미국에 도착한 당신에게 넥타이를 풀고 느슨하게 음악회장을 찾는 즐거움이 선사될 차례이다. “거쉰에게 바치는 찬사(A Tribute to Gershwin)” 라는 부제를 담은 이 연주회는 재즈와의 클래식의 환상적 결합을 가능케 한 작곡가 거쉰을 위한 축제이다. 재즈어법으로 클래식 음악의 예술성을 구현한 그에게 “거쉰은 재즈를 귀부인으로 만들었다”는 격찬이 쏟아졌으며, 그의 영향으로 당대의 많은 작곡가들이 재즈스타일의 작품을 연달아 발표하기도 했다.

누구든지 본능적으로 반응하고 동화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거쉰의 음악은 미국적 자유로움을 세계적인 것으로 교감시킨다. 음악회장을 나올 때면 흥겨운 콧노래가 절로 나올 당신, 오늘 밤은 거리의 불빛이라도 함께 불러 노래해 보자. “We got rhythm!”

7월 14일 모든 음은 다시 그에게로, 독일

바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2,3,4,5번

이 여행이 바하에서 귀결된다는 것은 비단 그가 속한 독일이라는 국가를 지칭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서양음악의 아버지’ 라고 불리우는 바하는 “모든 음악은 다시 그에게 돌아간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시공을 초월하여 깊이 존경받는 작곡가이다. 그의 음악관은 철저히 신에게 집중되어 있었으며, 모든 작품에 “s.D.g.(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께 영광)” 이라고 적을 만큼 신에 대한 사랑이 가득한 작곡가였다.

그의 최고 명작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은 전곡을 연주하는데만 무려 2시간 가량 걸리는 대곡이다. 1번과 6번을 제외한 모든 곡이 한 자리에서 연주될 오늘, 당신은 아무리 퍼 올려도 마르지 않는 샘과 같은 바하의 세계로 정중히 초대되었다.

여정을 마치며 우리가 도달한 그 곳은 미처 계획하지 못한 다른 나라이거나, 이 세상 너머의 알지 못하는 어딘가일 수도 있다. 음악이라는 마법의 손길에 당신의 여름을 맡겨 보는 건 어떨까. 음악이 데려다 주는 그 곳에서라면 서로 다른 너와 내가 노래하는 하나의 궁극적 사랑과 마주하게 될 지도 모른다.

   
 
     
 

송혜영
피아니스트. 이화여대와 대학원에서 피아노 전공, TCU에서 최고 연주자 과정 마친 후 UT 어스틴에서 음악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CTC 음악 강사. www.hyeyoungso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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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6.2007]The Clara Schumann Story

Filed under: Column — admin @ 9:28 pm

클라라 슈만의 이야기

2007년 06월 16일 (토) 04:00:41 송혜영  www.hyeyoungsong.com

학창시절 나는 친구들과 함께  대학로에 위치한 ‘슈만과 클라라’라는 커피샵을 종종 찾곤 했다. 클래식 음악과 유명연주가들의 영상을 보여주는 그 곳은 쉴 새 없이 질주하던 내 젊음이 잠시나마 느리게 세상을 응시할 수 있었던 소중한 쉼터이자 삶의 활력소였다.

‘슈만과 클라라’라는 이 낭만적 이름의 장소에서 나는 한 위대한 작곡가와 그의 숙명적 사랑이자 음악적 영감의 원천이었던 한 여인을 머리 속에 그려 보며 홀로 깊은 상념에 잠기곤 했다. 하지만 그 당시 내게 클라라는 슈만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반쪽의 이름에 불과했었다. 지금 누군가 내게 클라라에  대해 묻는다면, 나는 그를 한 여성음악가로서의  내 모습을 역사 속에 비춰볼 수 있게 한 고마운 장본인이라고 답할 것이다.   

Image:Clara Schumann 1853.jpg

클라라 비크

클라라  비크(Clara Wieck,1819-96)는 유명한 음악교사였던 아버지 밑에서 5살 때부터 체계적인 음악교육을 받았다. 9살 때 첫 데뷰무대를 가졌고 같은 해 직접 작곡한 피아노곡을 발표하는 등 그녀의 천재성은 놀라웠다. 그녀의 연주를 접했던 괴테, 멘델스죤, 쇼팽은 ‘신동’이라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아버지의 제자이던 젊은 작곡가 로베르트 슈만(Robert Schumann,1810-1856)과 사랑에 빠졌을 때, 그녀의 아버지는 아름답고 재능넘치는 딸을 가난한 음악지망생에게 허락하지 않았다. 3년 동안의 법적 분쟁을 통해 1840년 결국 결혼에 성공했을 때, 사람들은 그녀를 슈만의 부인이라 부르지 않고, 오히려 슈만을 클라라의 남편으로 불렀다고 한다.

진정한 파트너로서 로베르트와 클라라는 결혼생활을 통해 함께 음악을 연구하고 서로 음악적 영감을 주고 받으며 수 많은 걸작품을 만들어 냈다.

하지만 클라라의 천재적 재능에도 불구하고 당시 여성이 작곡가로서 인정받는 일은 험난했다. 1839년 그녀의 일기는 여성 작곡가로서의 고뇌를 드러내고 있다.

“나는 한 때 내가 대단한 창작력을 지녔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 생각을 떨쳐 버려야 할 지 모른다. 여성은 작곡과는 그리 잘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무도 그것을 가능하게 한 사람도 없었지 않은가. 내가 그럴 수 있을까? 내 아버지가 나로 하여금 가능하다고 믿게 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조차 너무 건방진 것일까?”

로베르트는 아내에게 작곡을 계속 권하면서 그녀를 지원하려고 했지만, 클라라가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책임을 다하면서 피아노 연주와 작곡까지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녀의 개인적 삶은 결혼을 위한 아버지와의 힘든 싸움, 남편의 정신병 발작과 사별, 그 후 일곱 자녀를 홀로 책임지면서 그 중 넷의 죽음을 그녀의 눈으로 보아야 했던 비극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불운했던 개인사와 사회적 편견의 벽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음악에 대한 열정을 결코 놓지 않았다. 클라라는 대부분의 남편의 작품들을 초연하였고  특별히 브람스와 쇼팽의 뛰어난 해석가로 높이 인정받았다.

당대의 유명한 피아니스트 리스트, 안톤 루빈스타인 등과 어깨를 겨루며 ‘피아노의 여왕’이라는 칭호를 받으며 전유럽을 정복했고, 심각한 류마티즘이 그녀를 멈출 때까지 당대 최대 레퍼터리를 소유한 연주가로서 당당히 활동하였다.

클라라가 평생을 바친 열정적인 연주활동과 음악계에 세운 업적들은 그 당시 사회에서의 여성의 지위를 생각할 때 더욱 위대한 의미를 지닌다. 서거 100주년이던 1996년 무렵 이후 작곡가로서 클라라에 대한 재평가가 더욱 활발히 이루어졌고, 그녀의 작품들은 이제 세계 곳곳의 많은 연주가들에 의해 새 생명을 얻고 있다.

클라라의 목소리

바하, 모짜르트, 베에토벤, 쇼팽…. 왜 서양음악사에 나타난 위대한 음악가들은 대부분이 남성일까라는 의문을 한 번쯤 품어 본 적이 있는 이라면 세상의 절반인 여성과 음악에 대한 관심 또한 기울여 보았을 법하다.

‘파리넬리’라는 영화를 통해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카스트라토’의 등장은 1500년대 교황청이 여성의 공연을 금지시킴으로써 작곡가들이 여성의 목소리를 가진 거세한 남성가수를 기용해야 했던 뿌리깊은 남녀차별의 역사에서 기인한다.

클라라 슈만을 비롯해 최초의 여성음악가로 알려진 힐데가르드 폰 빙엔, 난넬 모짜르트, 파니 멘델스죤과 같이 음악사에 기록된 소수의 여성음악가들은 그들이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오랜 동안 제대로 재능을 평가받지 못했다.

1880년, “여성은 음악을 작곡하기에 지나치게 감정적이고 스태미너가 부족할 뿐 아니라, 여성의 마음은 음악을 만드는데 과학적 논리를 가지 못한다.”라는 죠지 업튼(George Upton)의  말은 당시의 여성에 대한 시각을 고스란히 대변해 준다. 인간의 고귀한 문화유산이자 본질적으로 가장 자유롭고 아름다와야 할 음악의 영역에서조차 남성 우위의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은 인류의 슬픈 아이러니이다.

얼마 전 한 젊은 한국 여성 지휘자가 독일의 지휘 콩쿨에서 입상하였다는 낭보를 접하고 마음이 기뻤다. 여전히 여성 지휘자의 출현만으로도 화제거리가 되는 이 때,  참으로 기분 좋은 승전보가 아닐 수 없었다.

오늘 우리의 많은 딸들이 음악을 배우고 있다. 불과 100여 년 전 사회적 편견에 굴복하지 않고 당당히 예술혼을 불태운 클라라의 이야기를 이제 그들에게도 들려주어야 하지 않을까. 바라건대 음악을 가르치는 한 선생으로서 나는 그들이 음악을 통해  한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참된 모습과 조우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음악 안에서 새처럼 자유롭기를, 자신이 누구인지 말할 수 있고, 느끼고 생각하는 바 대로 표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무대에서 세상을 향해 당당히 울려 퍼지는 딸들의 건강하고 자유로운 목소리를 더 많이 듣게 되기를 소망한다.  

송혜영
피아니스트. 이화여대와 대학원에서 피아노 전공, TCU에서 최고 연주자 과정 마친 후 UT 어스틴에서 음악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CTC 음악 강사. www.hyeyoungso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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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2007] 음악을 향한 사랑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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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을 향한 사랑 고백

2007년 06월 02일 (토) 01:54:05 송혜영  www.hyeyoungsong.com

제 5회 반 클라이번 국제 아마추어 피아노 컴퍼티션에 부쳐

약 6년 전, 주로 음악을 전공하는 학생들과 선생들을 위한 한 피아노 페스티발에서 만난 중년의 그는 처음부터 눈에 띄는 사람이었다. 행사 안내책자에 소개된 글에 따르면 그의 직업은 건축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였는데, 햇빛에 그을린 검붉은 피부와 굵고 거친 손마디가 그것을 말해주는 듯 했다.

얼마 후 차례가 되어 무대에 오른 그는 또 한 번 관객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가 연주한 곡은 아마추어로서는 대범하게도 모짜르트 피아노 협주곡이었으니 말이다. 악보없이 피아노 앞에 앉은 그의 모습은 전문연주가 이상의 경건한 것이었다. 하지만 곡이 시작되자 마음과는 달리 뻣뻣하기만 한 자신의 손가락을 원망이라도 하듯 곡 중간에 몇 번씩이나 다급한 한숨을 뱉어내곤 했다.

무사히 마지막 음을 마치기까지 어느 새 마음을 졸이며 응원하던 나는, 전공자도 아닌 그가 이 곡을 배우면서 홀로 치루어 내었을 엄청난 노력과 시간을 감히 상상해 보며 그를 이 무대까지 이끈 그 무엇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잘 다듬어지지 않은 연주 내내 그는 “난 이 음악을 너무 사랑해!”라고 내 심장에 대고 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추어 피아니스트들의 향연

5월 28일 부터 6월 3일까지 일 주일 동안 포트워스 텍사스 크리스챤 대학(TCU)의 에드란드레스 홀(Ed Landreth Auditorium)에서는 반클라이번 협회(www.cliburn.org)에서 주최하는 제 5회 국제 아마추어 피아노 콩쿨(The fifth International Piano Competition for Outstanding Amateurs)이 열리고 있다.

미국을 비롯해 오스트레일리아, 브라질, 캐나다, 프랑스, 독일, 스위스 등 7개의 국가에서 온 75명의 올 해 참가자들의 직업은 회사원, 티비 프로듀서, 의사, 엔지니어, 항공승무원, 판사, 주부에 이르기까지 무척 다양하다. 이 콩쿨이 여느 다른 음악콩쿨과 크게 다른 점은 치열한 경쟁이 아닌 서로의 음악을 즐기고 나누는 축제의 장이 된다는 점이다. 이것은 이 피아니스트들이 모두 ‘아마추어’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지 모른다.

사실 음악인들에게 음악은 ‘일’이다. 끊임없이 탐구하며 창조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고통을 홀로 감수해야 하는 노동이다. 하지만 그 힘든 작업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마음 없이는 음악은 존재할 수 없다. 그런 면에서 모든 예술의 본질은 아마추어 정신에서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세계적인 지휘자 정명훈 씨는 지휘자가 되기 이전에 1974년 차이코프스키 콩쿨에서 피아노 부문 2위를 차지할만큼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다. 그는 피아니스트에서 지휘자로 진로를 바꾸면서 느낀 아마추어 정신의 중요성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진로를 바꾸면서 나는 프로페셔널 지휘자이자 아마추어 피아니스트가 되었다. 이제 아마추어라고 생각되자 예전에는 부담스럽기만 했던 피아노 연주가 즐거워졌다. 더 이상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로마에 살 때 콘서트홀이 바티칸 바로 옆에 있어서 교황과 추기경들을 만나볼 기회가 많았다. 그런데 교황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로부터도 깊은 인상을 받지 못했다. 그들이 너무나 프로페셔널해 보였던 탓이다. 그래서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려면 프로페셔널이라도 정신과 마음만은 아마추어인 것처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유학생활 중 내가 만난 동구권에서 온 피아니스트 친구들 중에는 자신은 음악 없이 살 수 없다고 고백하는 이들이 종종 있었다. 나는 그들의 확신에 가득 차 빛나는 눈을 보며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한 빵 대신 연주회장 앞에서 음악회 티켓을 구하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것은 어쩌면 그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진정 좋아하는 음악을 위해 댓가를 바라지 않고 열정을 바칠 줄 아는 그들의 마음은 행복한 아마추어의 그것이었다.

음악을 향한 순수한 사랑 고백의 축제

많은 이들이 내게 종종 묻는다. 음악을 공부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고. 타고난 재능인지 아니면 후천적 노력인지…. 그럴 때마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음악을 사랑하는 마음’을 꼽는다. 순수한 마음으로 음악을 사랑하고 즐거워하는 자세야 말로 진정 뛰어난 경지의 재능이자 노력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음악을 사랑하지 않고 음악으로부터 무언가 얻어내려고 하는 이들이 많아지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 경제적 이익을 위해, 혹은 자신의 명예를 얻기 위해 음악을 이용하려고 한다. 심지어 음악을 전공하는 학생들조차 정작 음악을 사랑하지는 않는 경우도 본다.

반복되는 연습에 음악을 향한 열정은 희미해지고 스스로 매너리즘에 빠져버리기도 한다. 그들에게는 아마추어와 같이 순수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 고차원의 지식을 터득하고 기술을 연마하는 일보다 훨씬 더 어려운 과제로 다가온다. 음악을 순수히 사랑하고 좋아하는 것이란 그 자체가 얼마나 복된 일인가!

인생을 살아가며 순수한 열정과 대면하는 일만큼 가슴뛰는 일은 없다. 이번 아마추어 피아노 콩쿨이 특별히 반가운 이유는 그것이다. 수 없이 많은 음악가들과 기술의  발전으로 원하기만 하면 어디서든 손쉽게 좋은 음악을 들을 수 있는 21세기에 살고 있지만, 나는 여전히 진정한 즐거움과 때묻지 않은 열정을 품은 음악만이 인간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혹여 아마추어라고 그들의 수준을 미리 의심하지 마시길. 많은 수는 여느 전공음악가의 얼굴을 부끄럽게 만드는 높은 수준의 연주가들이다. 음악에 대한 순수한 사랑 고백의 축제가 될 이 의미있는 행사에 온 가족과 함께 가 보는 건 어떨까. 음악을 향한 당신의 수줍은 고백도 함께라면 더 없이 좋을 것이다.

송혜영
피아니스트. 이화여대와 대학원에서 피아노 전공, TCU에서 최고 연주자 과정 마친 후 UT 어스틴에서 음악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CTC 음악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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