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anist Hyeyoung Song

November 1, 2008

[10.31.2008]Pianist Haesun Paik

Filed under: Column — admin @ 10:31 pm

‘멈추지 않는 열정으로, 피아니스트 백혜선’

[송혜영의 음악의 날개 위에]

제 13회 세계 피아노 교수법 컨퍼런스(The World Piano Pedagogy Conference)가 지난 주 나흘에 걸쳐 달라스에서 열렸다. 전미에서 모인 피아노 교육자들과 음악관계자들이 모인 이번 모임에는 반갑게도 한국을 대표하는 피아니스트 백혜선씨가 연주가로서 초청되었다. 그의 피아노 독주회를 마친 다음 날 호텔 로비에서 자연스럽고 솔직한 모습의 그를 만났다.

송혜영(이하 송): 어제 연주  마치고 어땠나?

백혜선(이하 백): 완전히 컨트롤이 있었던 연주 같진 않지만 굉장히 솔직하게 한 것 같다.

송: 뉴욕에서의 삶은 어떤가?

백: 두 아이들 키우느라 바쁘다. 한국을 떠나 무작정 간 곳이 뉴욕이 되었다. 여행을 많이 하는 편이어서 한국과 이동이 가장 쉬운 곳을 찾았다.

송: 한국에서의 교수직을 왜 그만 두었는지 이런 질문 많이 받았을 것 같다.

백: 미국에 온 지 벌써 삼 년이 되었다. 십 년 동안 서울대에서 가르치며 느낀 것은 선생이라는 사람은 학생을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선생과 연주자, 이 두 가지가 공존하는 것은 한국에서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송: 선생과 연주자로서의 훌륭한 모델이 되어 줄 것을 기대했었는데 조금 슬프다.

백: 처음 뉴욕에 도착을 해서 같은 음악 하는 사람들 보니까 다들 거북이 같이 사는 것 같더라. 그런데 어느 순간 내 성격이 굉장히 급해지고 눈치 봐서 대충 하는 것에 있어 선수로 변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번 컨퍼런스에서도 많이 느끼지만 음악 하는 사람들이 유명하건 안 유명하건 간에, 본인이 하는 일에 대해서 너무나 열심히 개척하려고 하고 남이 뭘 하는지 관심을 가지고 본다. 한국 사람들은 지명도를 보고 따라 가지, 정말 그 안에서 배울 게 있다고 해서 따라가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그런 게 참 서글펐다. 그리고 적어도 내 인생은 그렇게 살지 말자, 그래서 그냥 다 버리고 왔다.

송: 인터뷰에서나 무대에서나 타고난 솔직함과 낙천성이 있는 것 같다.

백: 낙천적인 것도 있고 배짱도 있었고…. 또 내가 교회를 아주 열심히 다닌 사람은 아니지만, 분명히 하나님이 돌봐 주실 것이라는 그 믿음 하나 밖에는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열심히 살면 분명히 쓰러지지는 않을 거라는 어떤 확신이 있었던 것 같다.

송: 크리스챤으로서의 신앙이 어제 바하/ 부조니의 코랄 프렐류드를 첫 곡으로 선곡한 것에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나?

백: 그런데 내가 제일 못 치는 곡이 그 곡 같다. 왜 이렇게 안 되는지 모르겠다.(웃음) 굉장히 정신무장이 필요한 곡인데 일단은 그 곡들로 시작을 하면 마음이 편하고 어디에 맡길 수 있다는 것이 큰 위로가 된다. 원래 그렇지 않았었는데 몇 년 전부터 그런 곡들로 시작을 하려고 노력을 한다. 일단 감사나 부탁, 기도하는 마음으로 시작하는 게 낫지 않나. 듣는 사람도 편하고 치는 사람도 집중할 수 있고, 너무 좋은 것 같다.

송: 요즘도 레슨은 계속 받고 있는가?

백: 얼마 전까지 왜 나는 연주하는 사람으로서 녹음을 한다든지 누가 이야기 해주기 전까지 내 것으로 완전히 들을 줄 모르나, 그게 굉장히 큰 고민이었다. 프로 골퍼들에게는 늘 코치가 있다. 본인이 다 잘한다고 생각하면 그 때부터가 망하는 지름길 같다. 나도 삼십 대에는 ‘이제 선생이 필요 없어. 내가 이 만큼 배웠는데… 내가 원하는 걸 해야지.’라는 생각을 했었다. 브렌델, 안스네스, 포고렐리치, 키신과 같은 탑 클래스 음악가들도 늘 선생이랑 함께 살았다.

근래 포고렐리치 연주가 말이 안 되게 무너지고 있는 것은 선생이었던 부인이 돌아가시고 나서 어디 가서 칠 곳이 없어서이다. 키신? 엄마와 선생과 동행하지 않으면 연주를 안 다닌다. 안스네스는 일 년 동안 쉬면서 새 레파토아를 배우고, 가끔 노르웨이로 돌아가서 자기 선생이랑 집중적으로 공부해서 다시 나온다. 특히 피아노는 혼자 연주하는 악기이기 때문에 결국은 자기가 믿는 사람에게 가서 할 수밖에 없다. 나도 삼십대 말부터 자주는 아니지만 스승이신 러셀 셔먼 교수에게 가서 연주도 하고 가끔 망신도 당하고 오기도 한다. (웃음) 하지만 다른 데 가서 망신당하는 거 보다 낫지 않나. 자신의 거울이 될 그런 사람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송: 1994년 차이코프스키 콩쿨을 비롯해서 수많은 국제 콩쿨에서 승승장구 해 왔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콩쿨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당신에게 콩쿨이란 어떤 의미인가?

백: 사실 내가 콩쿨을 했던 이유는 놀러가는 게 주목적이었다. 오랜 동안 보스턴에만 있다 보니 어디를 도망가야지 그렇지 않으면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콩쿨이 유일한 변명거리였다. 특히 유럽에는 구경도 많이 하고 싶었고, 워낙 호기심이 많은 사람인지라 남들이 어떻게 하나 궁금했다.

내가 콩쿨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콩쿨이라는게 사실은 스포츠랑 똑같지 않은가. 일단 정신 무장이 잘 된 사람이 이겨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예술적이다’라는 것은 그만큼 ‘예민하다’는 것이다. 키신 같은 사람을 콩쿨 내 보내면 일 차도 통과 못 한다. 신경이 날카로운 사람일수록 콩쿨에서는 잘 할 수 없게 되어 있다. 그래서 정말 잘 하는 이들은 예선에 다 떨어진다. 본선에 남는 이들은 대부분 제일 무난하고 예술적으로 조금 모자라도 선생님들 귀에 거슬리지 않는 사람들이다.

내가 콩쿨 다니면서 예술적으로 존경한 이들 중에서는 본선에 간 사람이 없다. 예를 들어 한국 피아니스트들 중에서 김원미씨를 가장 존경하는데, 같이 콩쿨 나갔을 때마다 김원미씨는 일 차에 다 떨어진다. 90년도 차이코프스키 콩쿨에 나가서 김원미씨, 안영신씨를 처음 만났는데, 한국사람들 중에서도 이렇게 괴짜들이 사는구나 했다. 한국사람으로 내가 아는 제일 예술적인 사람이 김원미, 안영신, 이 두 사람은 굉장히 존경하는 음악인들이다.

송: 전 세계적으로 통틀어서 존경하는 피아니스트는 누구인가?

백: 이태리 꼬모에서 공부하는 동안 만났던 앨리샤 데 라로차, 굉장히 가깝게 지냈는데 너무 좋은 분이셨다. 마르타 아르게리히는 언제 봐도 정말 대단한 것 같다. 남자 피아니스트는 누가 있을까. 내 선생님을 옆에서 보면 한결같고 존경스럽다.

송: 그 중에 제일 영향을 많이 미친 분이라면?

백: 셔먼 선생님이다. 그 분을 보고 있으면 말이 필요 없다. 여섯 시간에서 여덟 시간 연습을 하지 않는 날이 하루도 없다. 완전히 종교인의 삶을 사신다. 티칭을 제외하고는 무조건 연습시간이다. 점심도 안 드신다. 지금 연세가 여든이신데 쇼팽 마주르카, 베에토벤 소나타, 바하 잉글리쉬 조곡 전곡 녹음을 다 마치셨고, 다음은 슈만 프로젝트와 바하 평균율 전곡 녹음을 앞두고 계시다. 그런 선생님을 보고 있으면 내가 피아노를 친다고 할 수가 없다.

송: 셔먼 선생님께 음악적으로 어떤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하는가?

백: 오픈 마인드 되는 거, 어떤 카테고리 속에 들어가지 않는 거. 그리고 기본적, 양식적 캐릭터를 유지하면서도 거기에 국한되지 않는, 법을 알면서도 자유하는, 그 두 가지가 공존하는 것을 제일 많이 배운 것 같다. 예술이라는 것은 늘 변화해야 하는 것이고, 자신이 어느 순간 편안한 자리에 있다고 느끼면 그것은 죽은 거나 마찬가지라 생각하라고 말씀하신다. 항상 변화하고 늘 깨어 있는 본보기를 보여 주셨기 때문에 늘 자극이 많이 되었던 것 같다.

송: 국제무대에서 활동하면서 제일 어려운 점이 있다면 무엇인가?

백: 아무래도 인종차별이다. 여기 와서도 느꼈다. 일단은 동양인이라는 것에서, 또 여자라는 점에서 사람들이 외면을 한다. 어디 가서든 느낀다. 어제 연주하기 전까지는 나한테 말을 걸지 않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애당초 오기로 했던 세르게이 바바얀이 오지 않았고, 더군다나 러시안 남자 피아니스트를 대신해서 이름도 들어보지도 못한 동양여자가 와서 연주를 한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실망을 많이 한 상태였다. 그래서 사실은 어제 연주에 부담이 많았다. 생각하는 것보다는 나았던지 연주회 후에 나를 대하는 태도들이 완전히 다르다. 어제 저녁처럼 연주 후에 사람들이 내게 우르르 몰려들 때면 한 편으로는 씁쓸하다.

송: 베에토벤 소나타 Op.101을 오래 전 한국에서 들은 적이 있었고 이번에 다시 들었다. 어떤 특별한 애정이 있는 곡인가?

백: 그 곡은 내가 같이 울고 웃고 한 곡이다. 또 피아노 치는 사람들이 모인 컨퍼런스의 특성상 뭔가 본질적인 곡이 프로그램에 들어가야만 했다. 사실 리스트는 싫어하는 사람도 많고, 바하는 또 스페셜리스트가 있는 경우가 많고…. 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확신 있게 인정받을 곡으로는 베에토벤 만한 것이 없다. 내가 그렇게 할 수 있는 몇몇 소나타 중의 한 곡이었다.

송: 평소 자신만의 연습방법을 소개해 달라.

백: 물론 다른 연습도 하지만 악보를 보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큰 것 같다. 확실하게 자기 머릿속에 내가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 대한 계획이 있으면 그걸 따라 가게 되는 것 같다. 목적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내가 정말 그걸 하고 있는지 녹음을 해서 들어 보기도 한다.

송: 한국 학생들이 종종 상상력이 부족하고 음색이 빈약하다는 평을 듣는 것에 대해 조언을 한다면?

백: 한국 사람들은 독특하게 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굉장히 많은 것 같다. 자기만의 꿈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일단은 어른들이 모든 상상력을 죽이고 있다. 유태계 부모들은 아이가 남다른 것을 절대 겁내지 않는다. 아인슈타인, 스필버그의 유년 시절 일화들을 잘 알지 않는가. 예를 들어 우리는 아이를 학원을 보내 그림을 그리게 하지만, 유태계 부모는 선생님과 함께 전시회를 가게 한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네다섯 살 먹은 아이들이 전시회를 가는 것이 생활화 되어 있다.

송:  연주에 있어서 각 나라의 특성이 나타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백: 어디다 갖다 버릴 수 없다.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음악언어를 확실하게 이해를 하면 약간 이국적인 액센트가 들어가도 받아들여지는 것 같다. 그리고 오히려 그게 특성으로 보여질 수 있다.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를 확실하게 모르고 음악언어라는 것을 이해를 하지 못한 채, 선생만 따라하는 경우에는 소위 ‘한국 사투리’가 나오게 되어 있다.

송: 앞으로 계획을 알려 달라.

백: 첼리스트 로렌스 레서와의 베에토벤 첼로 소나타와 변주곡 전곡 연주로 여러 곳의 콘서트와 레코딩을 앞두고 있다. 다음 달엔 캐나다를, 내년에는 한국에서의 연주와 페스티발, 또 뉴욕 메네스음대에서 주최하는 ‘인터내셔널 키보드 인스티튜트’에 다시 초청되어 가게 된다. 차이코프스키 콩쿨 입상 이후에 바로 한국에 들어가는 바람에 내 연주를 들어 본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이번 컨퍼런스에서와 같이 지금은 이렇게 나를 알리는 때인 것 같다.

자신의 연주를 불과 몇 시간 앞 둔 시각에도 백혜선씨는 다른 교수의 특강을 듣기 위해 열심히 교실들을 찾아다니느라 여념이 없었다. 음악을 향한 열린 마음과 겸손, 지치지 않고 변화를 꿈꾸는 그의 날개는 오늘도 더 멀리 비상하고 있다.

http://www.thekonet.com/news/articleView.html?idxno=5410

September 13, 2008

[9.13.2008]십 년의 선물

Filed under: Column — admin @ 8:24 am

십 년의 선물
[음악의 날개 위에]
2008년 09월 13일 (토) 01:46:20 송혜영  www.hyeyoungsong.com

비행기 창문 너머 점점 작아지는 세상을 내려다 보며 나는 이런저런 상념에 젖어 든다. 늦은 여름휴가를 위해 떠나는 오늘은 공교롭게도 내가 미국유학길에 올라 DFW공항에 내린 지 정확히 십 년이 되는 날이기 때문이다.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는 지난 시간들이 구름 위로 펼쳐지는 동안, 내 기억은 자꾸만 어느 한 곳을 향해서 더 빨리 날아가고 있다.

텍사스 게이츠빌, 여러 교도소 빌딩들이 마을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작은 도시, 그 곳은 아주 특별한 나의 제자들이 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학위를 마쳐갈 즈음 가진 한 컬리지와의 인터뷰에서 학교 측은 대뜸 전혀 상상해 보지도 못 한 제안을 해 왔다. 교도소에서 재소자들에게 대학학점을 인정해주는 음악 강의를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치 거역할 수 없는 왕의 명령이 떨어진 것 같던 그 순간은, 내가 곧장 학기를 시작할 때까지 어떠한 망설임이나 두려움이 끼어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교도소 정문에서 교실이 있는 건물까지 수많은 철문과 정원에 흐드러진 키 작은 꽃들이 생경하게만 느껴지던 첫 수업 날, 지나가던 죄수복 차림의 한 여자가 나를 발견하고 멀리서 환한 인사를 건넨다. 사람이 사는 곳에서 나는 온기가 새삼 고맙다. 교실에 먼저 도착하여 짧은 기도를 올린 다음 오래된 수도원 같은 그 곳을 찬찬히 둘러 본다.

얼마 후 하나 둘씩 줄을 지어 교실로 들어서는 내 학생들은 모두 하얀 옷에 하얀 운동화, 같은 모양의 안경을 쓰고 있다. 자리에 앉은 그 눈망울들이 처음 보는 내게 알 수 없는 신호를 보낸다. 출석부를 펴고 그들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죄수복을 벗은 영혼들이 비로소 제각각의 목소리를 내며 내게 응답해 온다. 그렇게 시작된 우리의 첫 만남이 지금도 생생하다.

교도소라는 환경에서 가르치고 배우는 일은 많은 제약이 따르는 것이 사실이다. 학생의 이름은 반드시 성으로만 불리도록 되어 있으며, 적절한 거리감 유지를 위해 사제 간의 자연스러운 친밀감의 표현조차 철저히 금지되어 있다. 또 아무리 작은 물건이라도 개인이 소지할 수 없는 규정에 따라, 수업에 참여하기 위해서 모든 학생은 책과 연필, 종이를 배분받고 다시 반납해야 하는 엄격한 검사대 앞에 서야만 했다.

하지만 그들의 열정과 의지는 오래된 에어컨의 소음 때문에 귀를 쫑긋 세우고 연신 부채질을 해야 했던 열악한 환경 속에서 더 강해지는 것 같았다. 일생에 단 한 번도 악기나 음악에 대해 배워 본 적이 없는 이들이 대부분이었지만, 학생들의 높은 학구열과 학습 성취도는 매번 나를 놀라게 했다. 자발적으로 스터디그룹을 짜서 방대한 양의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카드로 정리하여 공부하던 그들을 바라보며 내가 느꼈던 뿌듯함을 무엇에 비견할 수 있겠는가.

음악의 원리를 배우며 인생을 이야기 하고 음악가의 삶을 통해 생의 가치를 확인하면서 그들은 시인이 되고 철학자도 되었다. 손뼉을 치며 다 같이 입 맞추어 노래하던 그 얼굴들에는 언제나 생의 기쁨이 넘쳐흘렀다. 출석을 확인하기 위해 간간히 수업을 방해하던 교도관이라도 없었다면, 그들도 나도 이 곳이 교도소라는 것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을 것이다.

가끔 그들이 견디어 온 삶의 고통과 무게를 그저 묵묵히 바라보기만 해야 한다는 것은 내게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끔찍한 자해의 흔적들이 뒤덮고 있는 여윈 팔을 모르는 척 지나치며, 세 살 때 헤어진 딸이 엄마의 전철을 밟지 않기만을 바라고 살아 왔는데 스무 살의 미혼모가 되어 자신을 면회 왔었다고 울먹이던 회한의 눈을 바라보며, 그들의 ‘어메이징 그레이스’가 점점 가늘게 잦아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나 혼자 뒤돌아서서 뜨거워진 눈시울을 숨겨야만 했던 적도 많았다. 아니다. 어쩌면 그들에게 할 수 있는 일이 음악 외에 아무 것도 없다는 무력감이, 내게 가르치는 일에 그토록 열심을 내도록 했는지도 모르겠다.

소박한 전자 키보드가 연주하는 멜로디에 금세 눈물을 글썽거리던, 이십 일 세기를 대표하는 음악가는 송선생님이라고 엄지손가락을 치켜 세우며 환호하던 어린 아이와 같은 얼굴들…, 십 년을 넘긴 긴 수감생활 중에 이 수업이 자신에게는 한 줄기의 신선한 공기였다고 감사를 전하며 사라지던 온화한 백발의 뒷 모습과, 기말고사 시험지 한 모퉁이를 연애편지를 쓰듯 정성들여 축복과 감사의 메시지로 채워 전해주던 그 따뜻한 손…. 진정 그대들은 내 꿈이자 기도이며 가장 아름다운 선물이었다.

높은 곳에 올라 보니 그들이 있는 곳이 더 가깝게 느껴진다. 어떻게 그들과 내가 텍사스 시골의 한 교도소에서 만나게 되었는지 십 년 전 나를 미국에 데려다 놓은 하늘은 알고 있었을까. 그 하늘은 오늘도 말없이 저 낮고 낮은 세상을 끌어안고만 있다.

http://www.thekonet.com/news/articleView.html?idxno=5198

 

June 28, 2008

[6. 27. 2008] Sing who I am

Filed under: Column — admin @ 4:53 pm

내가 누구인지 노래하라

[음악의 날개 위에]

– 뉴욕 필하모닉과 랑랑의 탄둔의 피아노 협주곡 연주회

지난 4월 나는 뉴욕 행 비행기에 올랐다. 이번 여행은 나를 초청한 뉴욕대학의 호세 멘데즈 교수를 비롯한 다른 세 명의 피아니스트들과 함께 갖기로 한 연주회를 위해서였다. 호텔에 짐을 풀자마자 여행의 미미한 피로감과 연주에 대한 긴장감도 잊은 채 나는 곧장 링컨센터의 에버리 피셔 홀(Avery Fisher Hall)로 향했다.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피아니스트 랑랑(Lang Lang)이 작곡가 탄둔(Tan Dun)의 피아노 협주곡을 세계 초연할 것이라는 소식에 텍사스를 떠나기 전 미리 예매를 해 두었던 차였다. 뉴욕필과 중국을 대표하는 음악인들의 만남이라는 색다른 기대감을 반영하듯 연주장은 이른 시각부터 만석을 이루고 있었다.

랑랑을 위한  탄둔의 피아노 협주곡

작곡가 탄둔은 영화 ‘와호장룡’의 음악으로 아카데미상을 수상하면서 국제적 명성을 얻었고,  베이징 올림픽 음악감독으로 임명될 만큼 중국이 자랑하는 대표적 음악가이다. 풍부한 감정과 화려한 기교를 가진 피아니스트 랑랑은 국제콩쿨의 경력 없이 그 실력을 검증받은 신세대 피아니스트 중 하나이다. 뉴욕 필하모닉이 탄둔에게 위촉한 두 번째 작품이기도 한 오늘의 피아노 협주곡은 처음부터 피아니스트 랑랑을 염두에 두고 쓰인 작품이라고 해서 더욱 화제를 모았다.

독주악기로서의 위엄이 강조된 피아노의 오스티나토(Ostinato; 일정한 음형을 같은 성부에서 같은 음높이로 계속 되풀이 하는 기법)로 문을 연 1악장은 서정적 선율과 색채적 화성, 날카로운 타악기적 리듬의 결합이 미묘한 조화를 이루며 전개되었다. 또 중국 전통악기의 소리를 피아노와 오케스트라 악기로 완벽하게 재현해 내며 이국적 분위기를 성공적으로 표출해 냈다.

느린 템포의 2악장은 몽환적 선율이 마치 소리를 오감으로 표현한 듯한 감각적 오케스트레이션과 함께 매력적으로 결합되었다. 이미 영화음악으로 실력을 쌓은 작곡가의 소리에 대한 입체적 구상력이 드러나는 부분이었다. 피아니스트 랑랑의 풍부한 감성과 탄탄한 테크닉은 중국 전통음악의 농현기법을 모방한 듯한 피아노의 빠르고 가지런한 연타에서 더욱 빛을 발하였고, 그것은 동양화의 여백을 물들이는 물감의 붓놀림과 같이 악장의 아름다운 서정을 섬세히 완성해 나갔다.

3악장은 청중에게 작품에 대한 작곡가의 상상력과 의도를 가장 구체적으로 납득시켜준 악장이라고 할 수 있다. 연주가 시작되기 전 비디오로 상영되었던 작품해설에서 탄둔은 동양의 전통적 소재인 음양의 이치를 손가락, 주먹, 팔꿈치 등의 인체부위를 이용한 무술(Martial Art)의 움직임을 통해 음악에 담아 보고자 했다고 밝힌 바 있다.

잠잠히 어슬렁거리는 피아노와 긴박한 빠른 몸짓의 오케스트라가 동시에 팽팽히 공존하는 설정은 동양 무예의 양면성과 역설적 미를 표현하고자 한 것임이 분명했다. 이에 부응이라도 하듯 랑랑은 과장된 몸짓과 관객석을 쳐다보는 여유로움까지 연출하며 스스로 건반 위의 무도인이길 자청했다.

현악기 주자들이 일제히 현을 뜯으며 바람을 가르는 채찍소리를 재현할 때에는 마치 드넓은 평원을 배경으로 한 중국 영화의 한 장면 속에 들어 온 것과 같은 극적 효과를 가중시켰고, 이 거대한 서사극은 마침내 피아니스트의 어깨로 내려친 거대한 톤 클러스터(Tone Cluster; 근접한 몇 개의 음들을 한꺼번에 뭉쳐 연주할 때 발생하는 음향)와 함께 통쾌히 막을 내렸다.

정체성을 향하여

모든 인간이 그러하듯이, 음악가에게  있어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은 영원히 소멸하지 않는 화두일 것이다. 이십대 후반의 나이에 미국으로 건너 온 작곡가 탄둔은 뉴욕의 다운타운에서 다양한 문화를 접하며 비로소 세계적 관점에서의 중국인에 대한 정체성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스스로 ‘서양의 마르코 폴로’라 불리길 원한다는 그의 음악에는 동양의 것을 서양에 소개하고자 하는 투철한 사명감이 반영되어 있다. 

종종 중국 전통의상을 입고 무대에 오르는 피아니스트 랑랑은 어디에서나 조국에 대한 높은 자긍심을 숨기지 않는다. 곡예를 부리듯 현란한 연주스타일을 고집하는 그는, 호불호의 논란과 많은 음악적 비판을 감수하면서도 그 상품성만은 성공적으로 입증해 왔다.

음악가로서, 인간으로서, 한 국가의 국민으로서 정체성에 관한 끊임없는 탐구와 음악적 실험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 당당히 노래한 그들이었기에 오늘의 갈채는 눈부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음악이 동양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문화상품의 한계에 표류하지 않으려면, 예술의 본질적 질문들에 대해 더 깊은 성찰을 거쳐야 할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http://www.thekonet.com/news/articleView.html?idxno=4867

June 14, 2008

[1.12.2008] A Letter for Youth

Filed under: Column — admin @ 10:09 pm

십대에게 띄우는 음악편지  
송혜영의 [음악의 날개 위에]

– 사랑하는 선에게

새해를 맞는 아침, 남편은 내게 짧은 연주를 부탁했다. 소박한 둘만의 연주회를 마치면서 나는 한 해를 아름다운 음악으로 시작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새삼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음악과 함께 하는 삶을 살게 해 달라고 기도했던 나의 십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래서였을까. 그 아침, 곧 열 여섯이 된다고 눈을 반짝거리며 웃던 네 생각에 오래 잠겼던 것은….

새해에 나는 훌륭한 음악회를 많이 찾아 다니는 네 모습을 꿈꾼다. 우리 주면을 조금만 둘러 보면 언제든지 좋은 음악회들의 소식을 들을 수 있다. 올 1월에 있을 안드레 와츠와 3월 랑랑, 4월 개릭 올슨과 안네 소피 폰 오터와 같은 유명 음악가들의 공연도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달라스 마이어슨 센터와 포트워스의 배스홀, 시립 오케스트라와 아트홀, 미술관과 공원, 그리고 여러 음악대학들의 홈페이지를 방문해 보면 다양한 공연 정보를 직접 얻을 수 있다. 음악은 언제나 가까운 곳에서 들어 줄 이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과, 직접 찾는 자들에게 그것을 향유하는 온전한 특권이 주어진다는 것을 네가 몸소 알아가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한다.

새해에는 평생 함께 하고픈 친구를 사귀듯 좋은 음반들을 네 곁에 많이 두도록 하여라. 바하의 첼로 무반주 조곡을 연주하는 거장 파블로 카잘스의 숨결로부터 음악이 인간에게 주는 순전한 위안을 네가 누려 보았으면 좋겠다.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하는 에프게니 키신이 고작 열 두살 소년이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신은 불공평하다고 입을 삐죽거릴지도 모를 네 모습은 또 얼마나 사랑스러울까.

비 내린 오후 청명한 햇살에 비치는 물방울을 응시하는 너의 창가에 클라라 하스킬의 모짜르트가 들렸으면, 가끔씩 아무도 몰래 깊은 슬픔의 심연속으로 침잠하고플 때 차이코프스키가 널 홀로 외롭게 하지 않았으면 한다. 진실된 친구 한 사람이 우리 인생에 가지는 의미와 같이, 십대 때 이루어진 한 장의 명반과의 만남은 그 사람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기도 한단다.

또 새해에는 비단 음악회나 음반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네 삶이 음악으로 가득 차길 바란다. 우리는 종종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혹은 책을 읽거나 미술 작품을 감상하면서 음악을 경험하기도 한다. 헤르만 헤세나 발자크의 소설을 읽다가 아마 쇼팽의 멜로디를 듣게 될지도 모른다. 만약 단테의 신곡이나 괴테의 파우스트를 읽었다면 리스트의 음악이 새롭게 이해되는 것을 경험할 것이다.

모네의 작품 속에 드비시가 황홀하게 펼쳐지고, 칸딘스키의 작품 속에 복잡한 쇤베르그의 음악이 형상화되는 순간을 너는 사랑하게 될 것이다. 신이 만든 모든 창조물과 인간의 예술작품 속에 존재하는 음악, 그것을 삶 속에서 깊히 경험하는 것만큼 즐겁고 값진 일이 또 있을까.  

마지막으로 새해에는 더 열심히 음악을 배우고 더 많이 나누기를 당부한다. 음악을 제대로 배운다는 것은 우리의 시간과 열정을 온전히 음악에 바치는 것을 의미한다. 음악의 아름다움에 사로잡혀 치열하게 고민하고 소중한 땀방울을 흘려본 이라면 어느 새 그의 삶도 아름답게 가꾸는 법을 체득하게 되리라. 내게는 어렸을 적 어머니가 흥얼거리시던 슈베르트가, 선생님이 부르시던 멘델스죤이 지금도 생생하다.

불꺼진 음악실에 모여 매일같이 음악회를 열던 여고시절, 친구들과 함께 나누었던 음악의 순수한 떨림은 나이든 내 가슴에 다시는 같은 모습으로 찾아 오지 않을런 지도 모른다. 한 사람이 음악을 사랑하게 되기까지는 반드시 함께 음악을 나누어 준 고마운 이들이 있다. 그리고 나는 네가 누군가에게 바로 그 고마운 사람이 되어 줄 수 있으리라 믿는다.

사랑하는 선아! 음악이 얼마나 네 영혼을 맑게 채색하고 생을 더없이 풍성하게 만들어 줄 지 생각만 하여도 나는 벌써 가슴이 뛴다.

‘그대 아름답고 즐거운 예술이여!/ 마음이 울적하고 어두울 때/ 그 아름다운 멜로디를 듣고 있으면/ 언제나 즐거운 기운 솟아나/ 마음의 방황 사라집니다./ 누구의 멜로디일까요./ 꿈결 같은 그 멜로디에/ 내 마음 어느덧 불타는 정열의 나라로 들어 갑니다./ 때로는 그대 하프에서 한숨이 흘러 나오고/ 때로는 그대의 달콤하고 성스러운 화음이/ 더 좋은 시절의 하늘을 내게 열어 보여 주었습니다./ 그대 아름다운 예술이여!/ 나는 그대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그대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먼 훗날 드려질 네 삶의 진정한 고백이 슈베르트의 노래와 함께 어우러 진다면…. 새해 아침, 나는 그렇게 행복한 네 꿈을 꾼다.

  http://www.thekonet.com/news/articleView.html?idxno=3896

 

 

[12.7.2007] Chopin’s Piano Les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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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의 피아노 레슨  
[음악의 날개 위에]

2007년 12월 07일 (금) 11:54:33 송혜영  www.hyeyoungsong.com  

    
    ▲ 쇼팽  
  
폴란드 태생의 프레데릭 쇼팽(Frederic Chopin, 1810-1849)은 19세기가 낳은 위대한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이다. 그의 제자들의 증언에 기초하여 쓰인 책 ‘Chopin : Pianist and Teacher : as seen by his Pupils’ 는 교육자로서의 쇼팽의 면모를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피아노의 시인’ 쇼팽은 과연 어떤 선생이었을까? 그의 레슨실을 노크해 보자.

교육자 쇼팽

쇼팽에게 가르치는 일은 작곡과 함께 그의 서른아홉 해의 삶에서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한다. 그는 교육의 중요성과 선생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잘 인지하고 있었다. 꾸준히 작곡활동을 하면서도 그는 매일 이른 아침에서 오후의 반나절을 평균 하루에 다섯 명 정도의 문하생을 가르치는데 사용했다.

쇼팽은 항상 정확한 시간에 단정한 차림으로 나타나 레슨을 시작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어린이나 초보자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 쇼팽에게 배우게  되기까지는 아주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일단 받아들인 학생과 그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까지 함께 나눌 정도로 가까웠다.

쇼팽은 학생들의 개인적, 음악적, 기술적 문제들에 대한 인격적 이해와 신뢰관계를 중요하게 여겼다. 그는 학생들의 자신감을 북돋아 주는 방법과 적절한 때를 잘 알고 있었다. 학생의 심리적 상태를 꿰뚫어 보는 통찰력을 지닌 그는 “너 자신이 되어라. 네가 느끼는 대로 자신을 표현하라. 나는 전적으로 무엇이든지 네가 하길 원하는 것을 신뢰한다. 스스로 만든 이상을 자유롭게 따르라.”는 말들로 필요할 때마다 그들을 격려했다.

이러한 진심어린 격려는 학생들로 하여금 표현의 기쁨과 예술적 자유를 충분히 경험하도록 만들었다.  
또 그 자신이 훌륭한 피아니스트였던 쇼팽은 학생의 어깨 뒤에서 설명하는 것 뿐 아니라 곡의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 연주해 주기도 했다. 그것을 본 제자들은 쇼팽보다 완전하고 위대한 피아니스트는 없을 것이라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학생들이 스스로 곡을 분석하고 작품의 분위기를 정하도록 유도했다. 이렇듯 철저한 직업정신과 교육적 혜안을 지닌 쇼팽의 교육자로서의 명성은 전 유럽과 러시아에 널리 퍼졌다.    

쇼팽의 가르침

쇼팽은 학생들이 암보로 연주하는 것보다 정확하게 악보를 보고 연주하도록 권장했다. 빈틈없이 실수와 잘못을 지적해 내느라 종종 두 세 마디를 완성시키기 위해 한 시간을 보내는 일도 허다했다. 특히 그는 손가락 번호에 대해 무척 엄격하였다.

학생들에게 손가락 번호를 한 번에 제대로 익혀서 다시는 바꾸는 일이 없도록 가르쳤다. 또 쇼팽은 손가락이나 손목만으로 연주하던 동시대 다른 음악가들과 달리 팔 전체를 이용하는 테크닉을 강조했다. 그는 항상 천천히 부드럽게 꽉 찬 톤으로 연습하길 요구했다. 그는 “마치 벨벳 손으로 건반을 쓰다듬듯 해야 한다. 건반을 때리지 말고 느껴라”라고 종종 말했다.

실제 레슨에서 쇼팽이 무엇보다도 강조했던 것은 듣는 훈련을 통해 귀를 정제시키고 근육의 조절과 이완을 돕는 정신적 연습이었다. 쇼팽의 유일한 피아노 선생이었던 지브니(Zywny)는 바이올리니스트였고 사실상 그 자신은 독학으로 피아노를 배운 셈이었다. 그래서 그는 누구보다도 연습에 있어서 손가락의 기계적 반복을 경계했다.

듣기와 터치의 섬세함을 발굴하는 것은 항상 그의 첫 레슨의 중대한 목적이었다. 그는 학생들에게 오래 연습하지 말라고 말하곤 했다. 오히려 양서를 읽고 미술 작품을 감상하거나 산책할 것을 권했다. 쇼팽의 교수법에서 테크닉은 수단, 그 이상의 것이 아니었기에 기술이나 거대한 울림만으로 뽐내는 연주를 결코 허락하지 않았다.  

제자들의 눈에 비친 쇼팽은 엄격한 가르침과 따뜻한 격려를 적절하게 배합한 투철한 소명감의 선생이었다. 또 연주와 창작에 대한 식지 않는 열정으로 훌륭한 음악가로서의 삶을 몸소 보여준 학생들의 롤모델이자, 불필요한 전통에 얽매이기보다는 새롭고 창조적인 방법으로 개개인의 학생에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발굴한 창조적 교육자였다.

얼마 전 어스틴에서 한 학생의 반가운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수 년 전 내 피아노 레슨을 수강했던 공대생이었다. 지금 대학원 공부 중인 그는 겨울 방학동안 어떤 곡을 연습해 볼까 하고 오랜 만에 피아노 앞에 앉았다가 불현듯 내 생각이 나서 연락을 했다고 한다.

세월이 흐른 후 먼지 쌓인 피아노 뚜껑을 열면서, 우연히 음악을 듣다가 내 얼굴을 떠올릴 수많은 그들에게 더 나은 선생이고 싶다는 열망으로 오늘 나는 오래된 쇼팽의 레슨실을 나선다.  

http://www.thekonet.com/news/articleView.html?idxno=3686

 

 

[11.3.2007]The Pianists in New York C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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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 맺어준 만남  
[송혜영의 음악의 날개위에] 뉴욕 여행에서 만난 피아니스트들

2007년 11월 03일 (토) 01:09:13 송혜영  www.hyeyoungsong.com  

지난 주 나는 개인적인 중요한 행사를 위해 뉴욕을 다녀왔다. 거대한 도시 문명 깊숙이 흐르는 정신적 물줄기를 찾아 거닐다 나는 감사하게도 많은 아름다운 영혼들과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과 내가 있던 그 곳에는 언제나 음악이 함께 있었다.

호세  멘데즈(Jose Ramon Mendez)

     
    ▲ 호세 멘데즈(Jose Ramon Mendez)  
  
뉴욕에서의 이튿날, 친애하는 스승이자 좋은 음악적 동지인 피아니스트 호세 멘데즈 교수와의 재회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UT 어스틴(Austin)에서 실내악 교수와 박사과정 학생으로 만난 우리의 인연은 그가 뉴욕대학(NYU)으로 옮긴 후에도 계속되어 왔던 차였다. 피아니스트 호세 멘데즈는 차세대 스페인 연주가들의 선두주자로 꼽힌다. 유년시절 스페인의 유명한 음악교사인 아버지로부터 배운 그에게 음악은 공기처럼 익숙하고 물과 같이 자연스럽다. 미국 유학시절에는 호로비츠의 제자였던 바이언 재니스(Byron Janis)에게 배우면서 폭넓은 레파토아를 섭렵하였고, 피아노 테크닉을 깨우치기 위해 인체학, 물리학 등 다방면의 학문을 깊이 연구하며 스스로의 이론을 정립해 낸 냉철한 지성가이기도 하다.

그는 오랜만에 보는 우리 부부를 극진히 환대해 주었다. 음악에 대한 진지한 토론과 서로에 대한 진심어린 격려가 오가고, 각자 연주생활에서 겪은 재미난 에피소드를 나누며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몰랐다. 그와 헤어져 돌아오는 길에 나는 머릿속에 “균형”이라는 화두를 떠올렸다. 지성, 감성, 그리고 테크닉의 조화로운 균형감각을 지닌 그의 음악은, 고독한 예술가이자 건강한 생활인으로서의 두 삶을 잘 조율해내는 그와 닮아 있기 때문이다. 바빴던 일상을 떠나 마음이 통하는 이들과 와인잔을 기울이며 실컷 음악 이야기를 풀어내는 동안, 내 삶은 어느새 아름다운 하모니를 연주하고 있었다.  

안드라스 쉬프(Andras Schiff)

     
    ▲ 안드라스 쉬프(Andras Schiff)  
  
카네기 홀에서 피아니스트 안드라스 쉬프의 베에토벤 소나타 전곡 연주 포스터를 보고 내 가슴은 요동쳤다. 헝가리 부다페스트 태생의 피아니스트 안드라스 쉬프의 베에토벤 소나타 전곡 연주는 2004년 유럽에서 먼저 시작되었고, 2009년 음반 녹음을 앞두고 이번 시즌에 북미지역 순회 연주로 열리게 된 것이었다. 기악음악의 신약성서라 불리는 베에토벤 피아노 소나타를 쉬프의 연주로 듣는다는 벅찬 기대감으로 가득 메운 청중들로 인해 카네기 홀은 연주 시작 전부터 술렁거렸다.

쉬프는 작곡가의 의도와 본질에 무서우리만큼 집중하면서 음을 통해 차원의 창조적 재구성을 이루어내고 있었다. 또 고전 소나타의 완벽한 구조와 베에토벤의 혁신적 음악적 요소들의 역설을 통해 작곡가의 심오한 내면세계를 투명하게 드러내 주었다. 그의 학구적인 집중력과 고도의 장인정신은 내게 마치 베에토벤의 그것을 보는 듯 했다. 답례로 연주된 슈베르트 또한 너무나 훌륭해서 청중들은 자리를 뜨지 못하고 열렬한 환호와 갈채를 보냈다. 이틀 후 있을 두 번째 독주회를 놓쳐야 한다는 아쉬움을 남기고 자리를 떠나야 했지만, 그의 음악과 함께 한 시간은 내게 여행지에서 가장 값진 보석을 캔 기쁨이었다.  

레온 플라이셔(Leon Fleisher)

     
    ▲ 레온 플라이셔(Leon Fleisher)  
  
예기치 않은 만남이 있어 여행은 더욱 즐겁다. 쉬프의 연주회의 시작을 기다리던 시간, 내 바로 옆 좌석에 자리를 잡은 노신사는 바로 피아니스트 레온 플라이셔였던 것이다. 천재 음악가로서 성공가도를 달리던 레온 플라이셔는 37세의 나이에 갑자기 근육긴장이상증으로 오른손의 마비가 시작되어 30년 이상 왼손만으로 연주한 불운의 피아니스트였다. 하지만 이에 굴복하지 않고 지휘자로, 교육자로 존경받는 음악가의 반열에 우뚝 선 거장이며 몇 해 전부터는 의학의 도움으로 다시 양손으로 연주활동을 재기 하면서 그는 음악과 삶으로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사실 레온 플라이셔 그 자신은  슈나벨의 제자로서, 베에토벤-체르니-레셰티츠키-슈나벨로 이어지는 계보를 잇고 있다. 나의 스승이신 UT 어스틴의 그레고리 앨런(Gregory Allen) 교수는 바로 레온 플라이셔의 수제자로서, 내가 앨런 선생님과 공부했었다는 이야기를 하자 “너도 내 제자로구나!” 라며 반가움을 숨기지 않았다. 그의 말은 베에토벤의 7세대 째 위치에 내가 서 있음을 새삼 상기시켰다. 터전을 떠나 온 곳에서 내 음악적 뿌리를 다시 만나게 되다니, 그것은 희열이었다.

만남은 아름답다. 여행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꽃 한 송이, 풀 한포기는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번 여행이 그 어느 때보다 풍성했던 것은 바로 음악이 맺어준 만남의 신비 때문이었다. 텍사스에 돌아와 보니 가을이 성큼 다가와 있다. 떠날 때 다시 만나게 되는 인생의 겸허한 진리 앞에 마음을 비우고 이 가을 매일 여행을 연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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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2007]The Nine Stairs to Heaven -The Beethoven Festiv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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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의 날개위에] 천국에 이르는 아홉 계단

-달라스 심포니의 베에토벤 페스티발을 맞이하며

2007년 10월 06일(토) 05:36:51 송혜영  www.hyeyoungsong.com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는 텍사스의 가을, 반가운 소식이 들린다. 바로 달라스 심포니가 베에토벤 페스티발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10월 18일부터 12월 2일까지 다섯 주에 걸쳐 베에토벤의 교향곡 전곡이 연주될 이번 페스티발에서는 네 명의 지휘자가 번갈아가며 연주를 맡는다.

그에 앞서 오는 7일에는 영화 ‘베에토벤의 머리카락(Beethoven’s Hair, 2005)’이 마이어슨 센터에서 먼저 상영될 예정이다. 다큐멘터리 형태의 이 영화는 베에토벤의 사후 남겨진 그의 머리카락에서 일반인보다 100배가 넘는 납성분이 검출되었다는 사실에 기초하여, 그의 정확한 사인을 유추해 보고 청력을 잃은 상태에서 끊임없이 작곡에 몰두했던 작곡가의 인생을 간접 경험하게 하는 래리 와인스타인 감독의 수작이다. 베에토벤을 듣기 전에 그의 인생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하는 달라스 심포니의 사려 깊은 기획력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오, 베에토벤!

모든 음악가가 사랑하고 경외하는 이름 베에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  유년시절부터 삶은 그에게 혹독했다. 그의 아버지는 심각한 알콜중독이었으며 베에토벤은 어려서부터 그의 어머니와 두 남동생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의 위치에 있었다. 젊은 작곡가로서 주목을 받으며 음악에 몰두하던 1795년 그의 청각장애는 시작되었고 1819년에는 완전히 청력을 잃게 된다. 1802년 여름, 청각상실과 동생들과의 불화로 괴로워하던 베에토벤은 비엔나 근교에 머무르면서 남동생 앞으로 그 유명한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를 쓴다.

“완전한 희망을 상실하였을 때 나를 만류했던 것은 오직 예술이었다… 그렇게 되어야 할 일이라면, 나는 기꺼이 죽음을 향해 나아가겠다… 그러나 그래도 나는 만족하리라, 죽음은 나를 끊임없는 고뇌의 상태로부터 해방시켜 주지 않겠느냐? 죽음이 찾아오고 싶을 때 언제든지 찾아와도 좋다. 나는 용감히 너를 맞이하겠다…. 나를 지탱해 온 고결한 용기도 이제는 사라졌다. 오, 신이시여, 단 하루를, 참다운 환희의 하루를 내게 내려 주십시오, 참다운 기쁨의 깊은 울림이 내게서 멀어져 간 지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렀는지… 신이시여, 언제 다시 환희의 날을 맞이할 수 있을까요? 그 날은 영원히 찾아오지 않을까요? 그것은 너무나 가혹합니다.”

유서는 고독하고 비참한 상태에서 예술만이 희망이었음을 고백하면서 이제는 주어진 고통을 받아들이고, 죽음 앞에서 의연할 것과 운명에 굴하지 않으며 용기 있게 맞서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육체적 고통에 의한 고립은 엄청난 내적 상상력으로 보상되었던 것일까. 공기 중에 울리는 소리의 아름다움을 들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그의 마음속에서 훨씬 많은 소리를 그려 낼 수 있었는지 모른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베에토벤의 음악은 보다 원숙한 음악양식을 가지게 된다.

아홉 개의 교향곡

베에토벤은 모두 9개의 교향곡을 남겼는데, 그 중 몇몇은 3번 ‘영웅’, 5번 ‘운명’, 6번 ‘전원’, 9번 ‘합창’이라는 부제로 대중에게 알려져 있다. 1번과 2번은 하이든과 모짜르트의 양식을 많이 따르고 있다. 하지만 3번에서는 이미 베에토벤의 독창적 양식이 완성된 것을 볼 수 있다. 5번은 유명한 오프닝 모티브 덕택에 아마 대중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곡일 것이다. 마지막 9번은 교향곡에 합창이 결합되는 혁신적인 형태를 가졌을 뿐 아니라, 독일의 시인 쉴러(Schiller)의시 ‘Ode to Joy’에 맞춰 부르는 노래에 나타난 용서와 화해의 메세지는 위대한 인류애로 발현되어 감격의 피날레를 완성한다.

베에토벤은 음악에 있어서 탁월한 건축가였다. 구조에 대한 그의 천재적 아이디어들과 기법은 하이든 모짜르트의 고전파 양식을 집대성하여 발전시키게 하였다. 베에토벤은 고전양식의 완성자이자, 옛 것과 새 것을 이어주는 연결자였다. 또한 그는 항상 거침없이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낸 혁신가였으며, 그리하여 낭만음악의 선구자 역할을 한 것으로 음악사에 평가된다.

57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그의 삶은 아침기도와 같이 경건했고 처절한 전사와 같이 치열하였을 것이다. 일전에 피아니스트 백건우씨는 베에토벤을 가리켜 ‘너무나 많은 사랑을 지니고 태어났지만 그 사랑을 표현하지 못했던 사람’이라고 묘사한 것을 읽은 적이 있다. 들을 수 없는 고독한 암흑의 세계에서 그가 펜을 들어 음표를 쏟아내야 했던 것은 말로는 차마 표현하지 못했던 그것, 사랑 때문이었으리라. 모든 악기와 목소리로 생을 긍정하며 형제를 포옹하는 그의 마지막 교향곡에 귀 기울이는 동안 우리는 어디선가 천국의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게 될지 모른다.

http://www.thekonet.com/news/articleView.html?idxno=3181

[8.25.2007] 상실의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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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음악

2007년 08년 25일 (토) 02:30:19          송혜영  www.hyeyoungsong.com

어린 아이들이 슬픈 음악을 얼마나 이해하고 연주할 수 있을까? 천진난만한 그들의 눈망울을 향해 슬픔이라는 감정을 논한다는 것이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일전에 내가 아는 교수님은 한 어린 학생에게 지금까지 겪었던 가장 슬펐던 일을 떠올려 보자고 했고,‘집에서 키우던 강아지가 죽었을 때’라고 대답한 그 아이는 잠시 후 놀랍게도 제 나름의 감정을 실어 연주를 하더라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사랑하던 강아지를 잃은 상실감은 어린 그가 태어나 겪은 가장 큰 슬픔이었던 모양이었다.

예술의 샘, 상실

누구나 끊임없이 상실을 경험하며 살아가듯이 위대한 작곡가들도 예외 없이 상실의 고통을 겪었다. 몇 년 전 체코 작곡가 야나첵에 대해 연구할 시절, 나는 그의 악보만 들여다보아도 금새 눈물이 맺히곤 했었다. 야나첵에게는 병으로 먼저 세상을 떠난 딸 올가가 있었는데 작품 곳곳에 딸을 향한 절절한 그리움이 고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죽음도 끊을 수 없었던 아버지의 사랑은 악보에 새겨져 아름다운 음악으로 세상에 남겨지게 된 것이다.

슈만은 어렸을 때 정신병력을 가진 친어머니와의 떨어져 살면서 애착관계가 결핍되었고, 누나의 자살과 아버지의 죽음으로 평범한 유년시절을 상실했던 사람이었다. 쇼팽은 평생 자신의 육체적 질병과 조국을 잃은 서러움, 실연의 상처 등의 상실감을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냉담한 세상에서 지독한 가난과 질병에 고통 받으며 매일 아침 깊은 절망 속에 눈을 떠야 했던 슈베르트는 결국 자신의 슬픔이 정신을 강하게 하고 슬픔으로 만들어진 작품이 세상을 행복하게 할 것이라고 믿었고, 그리하여 서른 한 해의 짧은 일생을 오로지 아름다운 음악을 작곡하는 데 바쳤다.

베에토벤은 술주정뱅이 아버지의 학대와 상처의 우울한 유년시절을 보냈고, 사랑하는 연인들과 결혼하지 못하는 좌절감을 겪었으며, 무엇보다도 음악가에게 가장 중요한 청각을 잃었다. 작곡가에게 사형선고와도 같은 청각의 상실은 그를 깊은 괴로움과 슬픔 속으로 밀어 넣었고, 1802년 급기야 자살을 생각하고 그 유명한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를 남기기에 이른다. 하지만, 생에 대한 굳건한 의지와 고결한 예술혼으로 다시 일어선 베에토벤은 귀를 통해서가 아니라 영혼으로 들어야 하는 위대한 작품들을 온 인류에게 선물했다. 위대한 작곡가, 그들에게 상실의 바닥은 절망이 아니라 아름다운 예술을 잉태하는 기적의 샘이었던 것이다.

상실의 골짜기에서 울리는 소리

학위를 다 마쳐 갈 즈음 나는 텍사스의 한 교도소에서 수감자들에게 음악을 가르칠 기회가 있었다. 교실에 그들을 위해 주어진 것은 조악한 음향 기기들과 나의 요청으로 구해진 조그만 전자 키보드가 전부였다. 하지만 끔찍한 죄목을 단 그들의 가슴에 작은 선율 하나가 파고들 때마다 그들은 온 몸을 떨며 감동했다. 그들은 한 때 자신의 양심을 돌보지 못한 자들이었고, 사회로부터 혜택보다는 크고 작은 불행을 겪어 온 자들이었다. 대부분은 처참한 환경으로부터 자신의 몸뚱아리를 지키기 위해 싸워온 치열한 생존자들이었으며, 이제 죄값을 대신해 가족과 함께 하는 소박한 저녁시간의 자유조차 잃어버린 자들이었다.

언젠가 수업시간에 쓰인 한 학생의 글을 읽다가 나는 그만 울고 말았다. “음악은 우주와 그 아래 모든 창조물들의 총체적인 결합체입니다. 심지어 별들도 듣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노래를 불러 주니까요. 음악은 ‘진정한’ 사랑입니다. 나는 음악이 나의 아주 큰 부분이길 바랍니다. 음악은 나의 사랑이고 그가 나를 사랑해 주듯이 나도 그를 사랑할 겁니다. 음악은 어떻게 말로 표현하기에는 너무 아름답습니다.”씻을 수 없는 아픔과 상처로 인해 자신의 존재조차 무감각해지고, 외부로 부터 철저히 단절된 상실의 골짜기에서 그들이 들었던 것은 아마도 신의 음성이 아니었을까.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갈수록 녹록치 않다. 하루가 멀다 하고 지구 곳곳에서 들려오는 다툼과 분쟁의 소식에 현대인은 본연의 인간다움을 점점 잃어간다. 예기치 않는 사고와 이해할 수 없는 비극 속에 상실의 고통은 이미 너무 익숙해 진 듯 우리는 모두 귀를 막고 조용히 속울음을 삼키며 산다. 눈부시게 화창한 오후, 이유 없이 날 울리고야 마는 바하의 선율 속에서 날 닮은 한 친구를 만나 살며시 그의 손을 잡는다. 음악이 그대의 눈에 눈물을 흐르게 하기를, 그리고 알게 되기를…. 메마른 뺨을 적시는 우리의 눈물이 뜨겁다는 것을….

http://www.thekonet.com/news/articleView.html?idxno=2682

[8.7.2007]The Opus I

Filed under: Column — admin @ 9:39 pm

그들의 작품번호 1

2007년 08월 04일 (토) 05:50:56 송혜영  www.hyeyoungsong.com

다른 예술분야와는 달리 음악에서는 대부분의 작품에 구체적 제목 대신 번호가 붙는다. 작품번호를 의미하는 오푸스(Opus, 혹은 줄여서 Op.)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말로서 본래 ‘일’이나 ‘작업’을 의미하는 말이다. 하지만 오푸스 번호가 반드시 작곡한 순서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 작곡가가 붙히는 것이 아니라 출판 당시 출판사에서 붙히는 것이 관행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출판된 순서를 나타내는 것이지만 모든 음악가에게 첫 작품, ‘Opus 1’의 의미는 특별할 것이다. 오늘은 위대한 작곡가들의 유명한 Opus 1들을 소개한다.

로베르트 슈만(1810 –1856)
‘Abegg’ Variations, Op.1

1830년, 부모의 뜻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법학도가 되었던 스무 살의 슈만이 음악가가 되길 결심하고 작곡과 피아노에 열정을 바친다. 그리고 약 1년 후 발표된 ‘아베그 변주곡’은 스무 살의 슈만이 세상에 내 놓은 최초의 작품이 되었다.당시 그의 어머니에게 쓴 편지에는 첫 작품의 출판을 앞두고 기쁨과 기대에 차 들뜬 그의 모습이 담겨있다. 제목 ‘아베그’는 무도회에서 반한 소녀의 이름이라는 설과 가공인물이라는 설이 있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그가‘Abegg’를 a,b,e,g,g라는 다섯 음으로 풀어 곡 전체의 동기로 사용하며 암호놀이를 즐긴다는 것이다. 신선한 주제와 우아한 시정은 첫 작품에 대한 작곡가의 풋풋한 열정과 이미 완성된 독창적인 양식을 보여준다.

요하네스 브람스(1833-1897)
Piano Sonata No.1 in C major, Op.1

브람스의 초기 작품들은 그의 스승이자 든든한 후원자였던 슈만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 주었다. 1853년 슈만은 브람스의 몇몇 작품들을 접하고 1853년 <음악신보>에 “새로운 길”이라는 글을 기고하며 브람스의 천재성을 세상에 소개하였고 브람스는 단숨에 유명한 인물이 될 수 있었다. 슈만의 추천과 도움으로 악보를 출판하기에 이르렀는데, 그 첫 작품이 바로 피아노 소나타 C장조이다. 이 작품 이전에 몇몇 곡들이 더 작곡되었으나 모두 스스로 폐기처분하였고 작곡시기로 보면 다른 소나타보다도 약간 늦게 작곡된 이 곡을Opus 1으로 출판한 것에서 첫 걸음부터 완벽을 추구하고자 했던 신중한 작곡가의 초상을 본다.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1873-1943)
Piano Concerto in F# minor, Op.1


라흐마니노프가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처음 작곡하게 된 것은 그가 모스크바 음악원 학생이던 1890년 즈음이었다. 실제로 가장 먼저 작곡된 작품은 아니지만 이 협주곡으로 인해 그가 작곡가로서 처음 인정받게 되었기에 Opus 1으로 출판되었다. 하지만 스스로 이 곡에 대해 불만족스러웠던 그는 무려 27년이 지난 1917년 철저히 개작하여 다시 출판하였다. 이 때는 이미 그가 피아노 협주곡 2번과 3번을 작곡한 후였고 작곡가로서 전성기를 구가하던 때였기에 원숙하고 완성도 높은 Op.1으로 재창조되었다. 같은 해 가을, 러시아 혁명으로 가족과 함께 핀란드로 망명한 그는 후에 미국에 정착하게 되는데, 그 후 다시는 그리워하던 모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라흐마니노프의 첫 작품인 피아노 협주곡 Op.1은 그가 모국에서 완성한 마지막 곡이 된 것이다.
 

알반 베르그(1885-1935)
Piano Sonata, Op.1

현대음악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쇤베르그, 베번과 함께 신비엔나악파라 불리우는 베르그가 1907년에 작곡한 첫 작품, 피아노 소나타 Op.1는 역사적으로 가장 뛰어난 Op.1 중의 하나라는 평을 받는다. 그가 쇤베르그에게 음악을 배우기 전에는 정규 음악교육을 받은 적이 거의 없다는 점을 감안할 때 가히 놀랄만한 수작이라 일컫지 않을 수 없다. 한 악장으로 이루어진 이 피아노 소나타는 탄탄한 전통적 구조 위에 쇤베르그의 영향을 받은  현대적 기법의 결합을 완성시키며 일관적 주제의 변주와 발전을 이루어낸다. 작곡가의 감출 수 없는 천재성과 스승 쇤베르그에 대한 필연적 경외와 애정이 녹아 있는 작품이다.

내게 작곡가들의 첫 작품들과 대면하는 일은 언제나 흥미롭다. 그것은 마치 소설가나 미술가의 처녀작을 찾아 보는 즐거움에 비유될 수 있을까? 법학도였다가 남보다 뒤늦게 음악의 길에 들어선 후 기대감에 벅찬 슈만의 벅찬 가슴, 열정을 바친 대작을 자신의 이름으로 처음 세상에 내어 놓는 브람스의 떨리는 손끝, 서툴렀던 첫 작품의 완성도를 높히기 위해 몰두했던 고국에서의 시간을 그리워 했을 라흐마니노프의 심장, 역사를 관망하며 새로운 음악어법 탄생의 출발선상에 선 베르그의 꿈꾸는 눈…. 평소 멀게만 느껴지던 천재들의 Opus 1 속에서 우리는 어느 새 함께 울고 웃는 친구가 되어 간다. 고마운 그들의 음악에 경의를 표하며 Opus 1의 오늘을 살자,다시 나를 일으킨다.

http://www.thekonet.com/news/articleView.html?idxno=2505

[7.14.2007]Pianist Van Cliburn

Filed under: Column — admin @ 9:33 pm

희망의 이름이 된 피아니스트, 반 클라이번

제 13회 차이코프스키 콩쿨 소식을 듣고

2007년 07월 14일 (토) 14:31:18 송혜영  www.hyeyoungsong.com

얼마 전, 러시아에서는 제 13회 국제 차이코프스키 음악 콩쿠르가 막을 내렸다. 세계 최고권위를 자랑하는 이 콩쿠르에서 한국의 임동혁군의 입상 소식을 전하는 언론들은 대부분의 입상자들이 러시아 자국민이라는 것에 대해 아쉬움과 우려 섞인 시선 또한 숨기지 않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달라스 포트워스 지역은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와는 각별한 인연이 있는 곳이라 할 수 있다. 바로 제 1회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우승하여 미국의 살아있는 전설이 된 피아니스트 반 클라이번과 그의 정신을 사랑하고 후원하는 이들이 숨쉬고 활동하는 고장이기 때문이다.

   
 
  ▲ 반 클라이번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와 반 클라이번

반 클라이번(Van Cliburn, 1934~)은 루이지애나 슈리포트 태생으로 여섯 살 때 텍사스 킬고어로 이주해 왔다. 피아니스트 어머니에게 세 살 때부터 정식 피아노 레슨을 받기 시작한 그는 그 다음 해에 첫 독주회를 열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줄리어드 음악원에서 스승 로지나 레바인과 공부하면서 러시아 낭만주의의 전통을 깊이 배울 수 있었고, 이것은 자연스럽게 그를 1958년 제 1회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 출전하도록 이끈 계기가 되었다. 클라이번이 결선에서 연주한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은 현지 청중들의 열렬한 기립박수를 받았으며, 심사위원들은 따뜻한 낭만과 젊은 패기가 어우러진 그의 뛰어난 연주에 1위의 영예를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계 2차대전과 한국전쟁 직후 공산진영인 소련과 자유진영의 미국의 갈등의 골이 깊어만 가던 냉전시대, 스물 세살의 미국 청년이 소련의 콩쿠르에서 우승하였다는 것은 전세계에 많은 것을 시사한 ‘사건’이었다. 1957년 세계 첫 인공위성 스푸트닉호(Sputnik) 발사의 성공으로 한층 고무되어 있던 소련으로서는 이 행사를 통해 자국의 문화적 우수성을 과시하고자 시작부터 단단히 벼르고 있던 차였다.

클라이번의 우승은 당시 열등감과 문제의식에 빠져있던 미국의 문화적 자존심을 크게 높여 주었고, 냉전의 갈등에 메말라 가던 전세계를 향해 음악이 국가간의 사상의 차이나 정치적 구도를 극복할 수 있다는 평화와 희망의 메세지를 던졌다.

또 그가 1958년 콘드라신의 지휘로RCA 빅터 오케스트라와 녹음한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과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은 열광적인 대중의 인기를 끌며 클래식 음반으로서는 처음으로 밀리언셀러의 반열에 올랐고, 타임지는 “러시아를 정복한 텍슨(The Texan Who Conquered Russia)” 이라는 제목으로 그를 표지에 싣는 등 미국인에게 반 클라이번은 음악가 이상의 것을 상징하는 이름이 되었다.

소통과 평화의 가치를 전하며

낭만 피아노 음악의 뛰어난 해석가로 칭송받으며 활발히 활동하던 중 매너리즘에 염증을 느껴 돌연 연주계를 잠적하기도 했던 그는 현재 포트워스에 거주하며 반클라이번 협회(cliburn.org)의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를 사랑하고 후원하는 이 지역 음악애호가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만들어진 이 단체는 국제 음악 콩쿠르 개최, 젊은 음악가와 학생들을 위한 교육과 연주활동 지원, 훌륭한 음악가들을 초청하여 공연을 유치하는 일 등에 바삐 움직이고 있다.

그 중에서도 1962년부터 포트워스에서 4년마다 열리고 있는 반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는 그 명성이 널리 알려진 행사로 성장하였다. 공교롭게도 역사적으로 러시아를 비롯한 많은 동구권 피아니스트들이 이 콩쿠르에서 눈에 띄게 선전하고 있는데, 러시아 본토의 음악이 이 곳에서 연주될 때면 마치 50여년 전 러시아에서 빛나던 클라이번의 영광이 겹쳐지는 듯 텍사스 청중들은 뜨거운 환호성을 감추지 못한다. 이제 반 클라이번은 정치적으로 첨예한 갈등을 빗던 두 국가간의 높은 벽을 허물고 문화적 교류를 가능케 한 이름으로서 사회에 남겨진 몫을 기쁘게 담당하고 있다.

이 지역 음악회장을 찾을 때면 친절한 웃음의 그와 종종 마추치게 될 지 모른다. 그럴 때면 “미스터 클라이번!”하고 반갑게 인사를 건네보는 것도 좋을 일이다. 뜨거운 가슴으로 음악의 힘을 온 세계에 증명하고 역사 속에서 걸어나온 한 음악가와의 만남은 먼 길 달려 음악회를 찾아 온 고단한 발걸음들에게 주어지는 또 하나의 즐거움일 것이다.

 http://www.thekonet.com/news/articleView.html?idxno=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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