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正道)를 걷고자 하는 재능에 날개를 달다
[반 클라이번 콩쿨 은메달 입상, 피아니스트 손열음 인터뷰]
2009년 06월 13일 (토) 01:54:01 송혜영
포트워스 배스 홀에서 열린 제 13회 반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쿨에서 한국의 손열음 양이 영예의 은메달을 수상했다. 금메달은 중국의 하우첸 장과 일본의 노부유키 츠지에게 돌아갔으며 동메달은 따로 수여되지 않았다. 역사상 유난히 한국 피아니스트들의 실적이 두드러지지 못했던 이 콩쿨에서 한국인으로는 지난 12회 은메달을 수상한 조이스 양 이래 두 번째 수상으로 한국음악계에 큰 경사가 아닐 수 없다. 시상식 이후 제대로 쉴 틈도 없이 더 바빠진 손열음 양을 만났다.
> 송혜영(이하 송): 정말 축하합니다. 이번 반 클라이번 콩쿨에 선 소감과 은메달 수상한 소감을 말해주세요.
손열음(이하 손): 이번에 준비하면서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고, 연주 자체에 아쉬움이 없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보다 더 잘 할 순 없었던 것 같아요. 왜냐하면 그 전까지는 콩쿨이든 연주든 이렇게까지 해 본 적이 없거든요. 제 일생 최고로 했고, 그 점에 대해서 훌륭했다고 생각하구요.
> 송: 콩쿨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과 힘들었던 순간은 언제였어요?
손: 가장 좋았던 순간은 타카쉬 콰르텟과의 연주였고, 일 차와 이 차 사이 하루 만에 스케줄이 갑자기 바빠지는 바람에 조금 힘들었던 것 같아요. 그 외엔 특별히 어려운 것은 없었구요.
> 송: 정말 대단해요. 특히 파이널에서는 삼 일 연속 연주해야 하는 살인적 일정을 소화해 냈어요. 부모님께서 많이 기뻐하시죠? 김대진 선생님, 아리에 바르디(Arie Vardi) 선생님 반응은 어떠세요?
손: 네, 특히 바르디 선생님은 콩쿨 중에도 거의 매일 전화해 주실 정도로 많이 신경써 주셔서 너무 감사드리고, 엄마 아빠도 한국에서 웹중계로 보실 수 있어서 좋아하셨던 것 같아요.
> 송: 여기 도착해서 몇 주 동안의 일상은 어떻게 보냈어요?
손: 계속 놀러다녔어요(웃음). 호스트 패밀리 아주머니랑 파티다니고 많이 돌아다니고 그랬어요. 연습은 밤에 한 두 세 시간 정도? 독일에서는 보통 밤에 건물에서 아홉 시나 열 시까지 밖에 연습을 못하거든요. 그래서 주로 낮에 했었는데, 여기는 그런 시간 제한이 없는게 너무 좋아서 밤에 주로 했어요. 어차피 제가 꾸준히 연습하는 스타일이 아니구요. 막 쉬었다가 또 할 땐 막 하는 스타일이라서….
> 송: 타카쉬 콰르텟과 브람스 퀸텟 연주에서 멋진 호흡을 들려줬어요. 그로 인해 실내악 상도 받았고, 어땠어요?
손: 먼저 사람들이 너무 좋아서 깜짝 놀랬구요. 워낙 이름 있는 콰르텟이라…. 그리고 제가 음반을 통해서 타카쉬 콰르텟을 좋아했었거든요. 그 분들만의 색깔이 있는 것 같아요. 제가 브람스 퀸텟을 많이 했었는데, 무대에서 같이 연주하는 어느 순간 이렇게 느꼈어요. “ 어? 이거 정말 음반에서 듣던 색깔이 나온다” 그러면서 신기해 했어요.
> 송: 또 페이지 터너(Page turner) 없이 연주해서 화제가 됐었어요.
손: 제가 원래 페이지 터너를 싫어해요. 사무적으로 보이쟎아요. 다른 연주자들에게는 페이지 터너가 없는데 피아니스트만 쓰는 게 싫고, 음악이랑 상관 없는 사람이 옆에 있는 느낌이 싫어서요.
> 송: 가끔 두 페이지씩 넘기는 바람에 보는 사람들을 많이 놀래켰어요.
손: 전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사실 악보도 필요 없구요. 사람들이 놀랬다고 많이 그러시던데… 저는 그거 인식도 못 했거든요.(웃음)
> 송: 지휘자 제임스 콘론(James Conlon)과의 연주는 어땠나요?
손: 좋았어요. 그 분이 나오는 다큐멘터리 본 적이 있는데 내용도 좋아서 기대도 많이 했었어요. 실제 연주에서 오케스트라와 안 맞는 부분이 약간 있었지만 다른 친구들 보니까 그나마 제가 제일 잘 맞은 거였더라구요.(웃음) 시상식 마치고 파티에서 먼저 찾아 오셔서 다음에 꼭 같이 연주하자고 하셔서 놀랐고 좋았어요.
> 송: 이번에 열음 양 프로그램들이 아주 인상 깊었어요. 일차부터 파이널까지 바로크부터 현대까지 다양한 양식과 작곡가의 작품들로, 곡들의 조성 관계까지 고려해서 아주 유기적으로 섬세하게 짰는데… 어떤 아이디어들이 있었나요?
손: 일단 음악을 최우선으로 했구요. 내가 칠 수 있는 걸 마구 집어 넣는 게 싫었고, 진짜 음악회 프로그램처럼 하고 싶었어요. 일 차 때는 독일 중심의 친숙한 곡들을 넣었고(하이든, 슈만, 리스트), 18세기 이후 곡들로 짠 이 차 곡들은 치면서 제가 제일 기분 좋을 만한 곡들로, 파이널은 독주회와 두개의 콘체르토가 서로 대비되게 하려고 했어요.
> 송: 특히 바하, 슈베르트, 베에토벤으로만 이루어진 파이널 독주 프로그램은 콩쿨에서 대단한 ‘용기’였어요. 하지만 그 의도가 느껴졌죠. 콘체르토까지 이렇게 연결이 되는구나 하고…. 그럼 모든 프로그램은 기본적으로 본인이 짠 건가요?
손: 네, 독일에 제가 음악적으로 제일 신뢰하는 친한 친구가 있는데 이번에 도움을 많이 줬어요. 물론 선생님께서도 도와 주셨는데, 예를 들면 제가 드비시 프렐류드를 대여섯 곡 정도 치고 싶다고 말씀드리면 3번에서8번까지가 어떠냐고 조언해주시는 식으로요. 어쩔 땐 이건 아니다라고 하셔서 다시 짜기도 하구요.
> 송: 드비시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드비시 해석이 색달랐다고 생각해요. 어떤 영향을 받은 해석인가요? 소리에 대한 테이스트가 상당히 독특했어요.
손: 감사합니다. 제가 사운드 프로듀싱이나 칼라링은 좀 자신이 있는 편이라서…. 드비시는 듣는 입장에서도 워낙에 좋아하지만, 치는 입장에서도 드비시만큼 재미있는 게 없는 거 같아요. 제 선생님께서도 드비시 전곡 녹음을 하셨었고 일가견이 있으셔서 도움도 많이 받았구요. 예전에 독일에서 처음으로 드비시 프렐류드를 연주할 때였는데 연주 일 주일 전에 무작정 빠리로 갔어요. 도저히 프랑스에 대해 아무 것도 안 느껴 본 상태에서 치는게 싫어서요. 빠리에 삼 일 있다가 와서 연주했구요. 앞으로 기회가 되면 불어도 배워 보고 싶어요.
> 송: 멋져요. 스스로 칼라링에 자신이 있다고 했는데요. 제가 이번에 느꼈던 것도 열음양이 자신의 소리를 만들어 내는 연주를 하더라는 거에요. 본인이 생각하는 강점과 약점은 뭐라고 생각해요?
손: 강점은 제가 남들보다 여러 가지를 할 수 있는 거 같구요. 예를 들면 보통 기성 연주자들은 자기의 분야가 있는 경우가 많잖아요. 루푸가 라흐마니노프를 치지 않고 브렌델이 쇼팽을 하지 않는 것 처럼…. 그렇지만 저는 그런 건 없는 것 같아요. 앞으로도 계속 그런 식으로 하고 싶어요. 약점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너무 세세한 거라서…. 일단 무대와 연습할 때의 간극이 좀 더 없어졌으면 좋겠구요. 제가 디테일에 집착해서 그런지 무대에서 내려오면 스스로 만족하는 경우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너무 적어요.
> 송:독일에서의 음악 공부랑 생활은 어때요?
손: 너무 좋아요. 일단 선생님이 너무 좋으시구요. 이제 미국에 연주여행 다니느라고 공부할 시간이 줄어들까봐 그게 좀 걱정이긴 한데 어떻게든 잘 조절해서 공부를 계속 열심히 할 생각이에요. 처음에 독일로 간 이유가 선생님 때문이었는데, 지금은 독일 자체도 너무 좋아요.
> 송: 아리에 바르디 선생님께 주로 어떤 점을 배우고 있다고 생각해요?
손: 모든 점에서 너무 영향이 크구요. 걸어다니는 사전이라고 불리실 만큼 모르시는 게 없으시구요. 또 선생님이야 말로 영역 제한이 없으셔서 고전부터 현대까지 다 가리지 않고 하시는 분이시고, 그래서 저도 폭이 점점 넓어지는 것 같아요.
송: 이번 콩쿨의 프로그램 같은 것을 계획하고 실행할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열음양의 레파토리가 워낙 넓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지요. 광대한 레파토리를 가지고 있는데 만약에 일생에 단 한 번의 전곡 연주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떤 작곡가의 작품으로 하고 싶어요?
손: 모짜르트 콘체르토? 아, 아니에요. 모짜르트 바이올린 소나타. 좋은 바이올리니스트와 그걸 연주하는 게 제 꿈이에요. 모짜르트는 워낙 제 인생이지만, 바이올린 소나타는 정말 완벽한 것 같아요. 피아노 소나타보다 훨씬 좋은 것 같아요. 바이올리니스트가 좋은 사람이 있으면 좋을텐데…. 요즘 찾고 있는데요. 아직 특별히 와 닿는 사람은 없어서 잘 모르겠어요.
송: 꼭 곧 찾길 바랄게요. 자, 이제 콩쿨은 끝났고 인생은 또 계속되겠지요. 열음 양은 삼 십 년 후 어떤 음악가로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싶어요? 궁극적으로 어떤 음악가가 되고 싶은게 꿈이에요?
손: 요즘 드는 생각인데, 어차피 음악이란 것은 추상적이고 개인적인 것이고 사람이라면 다 다른 의견을 가질 수 있는 거니까, 다수한테 인정받는 걸 목표로 하지는 않구요. 소수의 사람들이더라도 저와 함께 음악 이야기를 할 수 있고 테이스트를 교류할 수 있는, 또 제가 인정하는 테이스트를 가진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게 소수든 다수든 전혀 상관없구요. 그냥 그럴 수 있으면 좋겠어요.
> 송: 이제 미국에도 자주 오게 될 텐데 지금까지 정해진 연주계획 있나요?
손: 자세한 계획은 오늘 오후에 받을텐데요. 어제 포트워스 심포니와 연주로 칠 월 초에 와 줄 수 있냐고 제의를 받았는데 제가 마침 독일에서 연주가 있어서 못오게 되었고, 그 다음 주에 다른 연주로 미국에 오게 될 것 같아요.
> 송: 곧 또 보게 되겠네요. 세상에는 어려서 대단한 재능을 보이는 영재들이 더러 있어요. 열음양도 그들 중 한 명이었구요. 하지만 크면서 재능을 믿고 다른 길로 가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이번에 연주들을 보면서 열음 양은 정도를 가려고 하는구나 라고 느꼈어요. 그래서 열음양 미래에 더 많은 기대를 하게 되요. 다시 한 번 축하합니다.
손: 감사합니다.
은메달과 실내악 상을 수상한 손열음 양은 상금 이만 삼천 불과 함께 앞으로 삼 년동안 미주 연주 매니지먼트와 하모니아 문디 미국 레이블로 음반을 내는 부상을 받게 된다. 자신의 타고난 재능에 의지하지 않고, 외롭고 힘들지만 묵묵히 정도를 걷고자 하는 한 젊은 음악인에게 날개가 달렸다. 다수에게 인정받기보다는 스스로에게 진실된 음악을 하고 싶다는 그의 어깨를 껴안으며 한 사람의 음악인으로서 이보다 더 든든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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