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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의 피아노 레슨
[음악의 날개 위에]
2007년 12월 07일 (금) 11:54:33 송혜영 www.hyeyoungsong.com
폴란드 태생의 프레데릭 쇼팽(Frederic Chopin, 1810-1849)은 19세기가 낳은 위대한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이다. 그의 제자들의 증언에 기초하여 쓰인 책 ‘Chopin : Pianist and Teacher : as seen by his Pupils’ 는 교육자로서의 쇼팽의 면모를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피아노의 시인’ 쇼팽은 과연 어떤 선생이었을까? 그의 레슨실을 노크해 보자.
교육자 쇼팽
쇼팽에게 가르치는 일은 작곡과 함께 그의 서른아홉 해의 삶에서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한다. 그는 교육의 중요성과 선생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잘 인지하고 있었다. 꾸준히 작곡활동을 하면서도 그는 매일 이른 아침에서 오후의 반나절을 평균 하루에 다섯 명 정도의 문하생을 가르치는데 사용했다.
쇼팽은 항상 정확한 시간에 단정한 차림으로 나타나 레슨을 시작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어린이나 초보자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 쇼팽에게 배우게 되기까지는 아주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일단 받아들인 학생과 그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까지 함께 나눌 정도로 가까웠다.
쇼팽은 학생들의 개인적, 음악적, 기술적 문제들에 대한 인격적 이해와 신뢰관계를 중요하게 여겼다. 그는 학생들의 자신감을 북돋아 주는 방법과 적절한 때를 잘 알고 있었다. 학생의 심리적 상태를 꿰뚫어 보는 통찰력을 지닌 그는 “너 자신이 되어라. 네가 느끼는 대로 자신을 표현하라. 나는 전적으로 무엇이든지 네가 하길 원하는 것을 신뢰한다. 스스로 만든 이상을 자유롭게 따르라.”는 말들로 필요할 때마다 그들을 격려했다.
이러한 진심어린 격려는 학생들로 하여금 표현의 기쁨과 예술적 자유를 충분히 경험하도록 만들었다.
또 그 자신이 훌륭한 피아니스트였던 쇼팽은 학생의 어깨 뒤에서 설명하는 것 뿐 아니라 곡의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 연주해 주기도 했다. 그것을 본 제자들은 쇼팽보다 완전하고 위대한 피아니스트는 없을 것이라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학생들이 스스로 곡을 분석하고 작품의 분위기를 정하도록 유도했다. 이렇듯 철저한 직업정신과 교육적 혜안을 지닌 쇼팽의 교육자로서의 명성은 전 유럽과 러시아에 널리 퍼졌다.
쇼팽의 가르침
쇼팽은 학생들이 암보로 연주하는 것보다 정확하게 악보를 보고 연주하도록 권장했다. 빈틈없이 실수와 잘못을 지적해 내느라 종종 두 세 마디를 완성시키기 위해 한 시간을 보내는 일도 허다했다. 특히 그는 손가락 번호에 대해 무척 엄격하였다.
학생들에게 손가락 번호를 한 번에 제대로 익혀서 다시는 바꾸는 일이 없도록 가르쳤다. 또 쇼팽은 손가락이나 손목만으로 연주하던 동시대 다른 음악가들과 달리 팔 전체를 이용하는 테크닉을 강조했다. 그는 항상 천천히 부드럽게 꽉 찬 톤으로 연습하길 요구했다. 그는 “마치 벨벳 손으로 건반을 쓰다듬듯 해야 한다. 건반을 때리지 말고 느껴라”라고 종종 말했다.
실제 레슨에서 쇼팽이 무엇보다도 강조했던 것은 듣는 훈련을 통해 귀를 정제시키고 근육의 조절과 이완을 돕는 정신적 연습이었다. 쇼팽의 유일한 피아노 선생이었던 지브니(Zywny)는 바이올리니스트였고 사실상 그 자신은 독학으로 피아노를 배운 셈이었다. 그래서 그는 누구보다도 연습에 있어서 손가락의 기계적 반복을 경계했다.
듣기와 터치의 섬세함을 발굴하는 것은 항상 그의 첫 레슨의 중대한 목적이었다. 그는 학생들에게 오래 연습하지 말라고 말하곤 했다. 오히려 양서를 읽고 미술 작품을 감상하거나 산책할 것을 권했다. 쇼팽의 교수법에서 테크닉은 수단, 그 이상의 것이 아니었기에 기술이나 거대한 울림만으로 뽐내는 연주를 결코 허락하지 않았다.
제자들의 눈에 비친 쇼팽은 엄격한 가르침과 따뜻한 격려를 적절하게 배합한 투철한 소명감의 선생이었다. 또 연주와 창작에 대한 식지 않는 열정으로 훌륭한 음악가로서의 삶을 몸소 보여준 학생들의 롤모델이자, 불필요한 전통에 얽매이기보다는 새롭고 창조적인 방법으로 개개인의 학생에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발굴한 창조적 교육자였다.
얼마 전 어스틴에서 한 학생의 반가운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수 년 전 내 피아노 레슨을 수강했던 공대생이었다. 지금 대학원 공부 중인 그는 겨울 방학동안 어떤 곡을 연습해 볼까 하고 오랜 만에 피아노 앞에 앉았다가 불현듯 내 생각이 나서 연락을 했다고 한다.
세월이 흐른 후 먼지 쌓인 피아노 뚜껑을 열면서, 우연히 음악을 듣다가 내 얼굴을 떠올릴 수많은 그들에게 더 나은 선생이고 싶다는 열망으로 오늘 나는 오래된 쇼팽의 레슨실을 나선다.
상실의 음악
2007년 08년 25일 (토) 02:30:19 송혜영 www.hyeyoungsong.com
어린 아이들이 슬픈 음악을 얼마나 이해하고 연주할 수 있을까? 천진난만한 그들의 눈망울을 향해 슬픔이라는 감정을 논한다는 것이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일전에 내가 아는 교수님은 한 어린 학생에게 지금까지 겪었던 가장 슬펐던 일을 떠올려 보자고 했고,‘집에서 키우던 강아지가 죽었을 때’라고 대답한 그 아이는 잠시 후 놀랍게도 제 나름의 감정을 실어 연주를 하더라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사랑하던 강아지를 잃은 상실감은 어린 그가 태어나 겪은 가장 큰 슬픔이었던 모양이었다.
예술의 샘, 상실
누구나 끊임없이 상실을 경험하며 살아가듯이 위대한 작곡가들도 예외 없이 상실의 고통을 겪었다. 몇 년 전 체코 작곡가 야나첵에 대해 연구할 시절, 나는 그의 악보만 들여다보아도 금새 눈물이 맺히곤 했었다. 야나첵에게는 병으로 먼저 세상을 떠난 딸 올가가 있었는데 작품 곳곳에 딸을 향한 절절한 그리움이 고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죽음도 끊을 수 없었던 아버지의 사랑은 악보에 새겨져 아름다운 음악으로 세상에 남겨지게 된 것이다.
슈만은 어렸을 때 정신병력을 가진 친어머니와의 떨어져 살면서 애착관계가 결핍되었고, 누나의 자살과 아버지의 죽음으로 평범한 유년시절을 상실했던 사람이었다. 쇼팽은 평생 자신의 육체적 질병과 조국을 잃은 서러움, 실연의 상처 등의 상실감을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냉담한 세상에서 지독한 가난과 질병에 고통 받으며 매일 아침 깊은 절망 속에 눈을 떠야 했던 슈베르트는 결국 자신의 슬픔이 정신을 강하게 하고 슬픔으로 만들어진 작품이 세상을 행복하게 할 것이라고 믿었고, 그리하여 서른 한 해의 짧은 일생을 오로지 아름다운 음악을 작곡하는 데 바쳤다.
베에토벤은 술주정뱅이 아버지의 학대와 상처의 우울한 유년시절을 보냈고, 사랑하는 연인들과 결혼하지 못하는 좌절감을 겪었으며, 무엇보다도 음악가에게 가장 중요한 청각을 잃었다. 작곡가에게 사형선고와도 같은 청각의 상실은 그를 깊은 괴로움과 슬픔 속으로 밀어 넣었고, 1802년 급기야 자살을 생각하고 그 유명한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를 남기기에 이른다. 하지만, 생에 대한 굳건한 의지와 고결한 예술혼으로 다시 일어선 베에토벤은 귀를 통해서가 아니라 영혼으로 들어야 하는 위대한 작품들을 온 인류에게 선물했다. 위대한 작곡가, 그들에게 상실의 바닥은 절망이 아니라 아름다운 예술을 잉태하는 기적의 샘이었던 것이다.
상실의 골짜기에서 울리는 소리
학위를 다 마쳐 갈 즈음 나는 텍사스의 한 교도소에서 수감자들에게 음악을 가르칠 기회가 있었다. 교실에 그들을 위해 주어진 것은 조악한 음향 기기들과 나의 요청으로 구해진 조그만 전자 키보드가 전부였다. 하지만 끔찍한 죄목을 단 그들의 가슴에 작은 선율 하나가 파고들 때마다 그들은 온 몸을 떨며 감동했다. 그들은 한 때 자신의 양심을 돌보지 못한 자들이었고, 사회로부터 혜택보다는 크고 작은 불행을 겪어 온 자들이었다. 대부분은 처참한 환경으로부터 자신의 몸뚱아리를 지키기 위해 싸워온 치열한 생존자들이었으며, 이제 죄값을 대신해 가족과 함께 하는 소박한 저녁시간의 자유조차 잃어버린 자들이었다.
언젠가 수업시간에 쓰인 한 학생의 글을 읽다가 나는 그만 울고 말았다. “음악은 우주와 그 아래 모든 창조물들의 총체적인 결합체입니다. 심지어 별들도 듣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노래를 불러 주니까요. 음악은 ‘진정한’ 사랑입니다. 나는 음악이 나의 아주 큰 부분이길 바랍니다. 음악은 나의 사랑이고 그가 나를 사랑해 주듯이 나도 그를 사랑할 겁니다. 음악은 어떻게 말로 표현하기에는 너무 아름답습니다.”씻을 수 없는 아픔과 상처로 인해 자신의 존재조차 무감각해지고, 외부로 부터 철저히 단절된 상실의 골짜기에서 그들이 들었던 것은 아마도 신의 음성이 아니었을까.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갈수록 녹록치 않다. 하루가 멀다 하고 지구 곳곳에서 들려오는 다툼과 분쟁의 소식에 현대인은 본연의 인간다움을 점점 잃어간다. 예기치 않는 사고와 이해할 수 없는 비극 속에 상실의 고통은 이미 너무 익숙해 진 듯 우리는 모두 귀를 막고 조용히 속울음을 삼키며 산다. 눈부시게 화창한 오후, 이유 없이 날 울리고야 마는 바하의 선율 속에서 날 닮은 한 친구를 만나 살며시 그의 손을 잡는다. 음악이 그대의 눈에 눈물을 흐르게 하기를, 그리고 알게 되기를…. 메마른 뺨을 적시는 우리의 눈물이 뜨겁다는 것을….
그들의 작품번호 1
2007년 08월 04일 (토) 05:50:56 | 송혜영 www.hyeyoungsong.com | ![]() |
다른 예술분야와는 달리 음악에서는 대부분의 작품에 구체적 제목 대신 번호가 붙는다. 작품번호를 의미하는 오푸스(Opus, 혹은 줄여서 Op.)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말로서 본래 ‘일’이나 ‘작업’을 의미하는 말이다. 하지만 오푸스 번호가 반드시 작곡한 순서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 작곡가가 붙히는 것이 아니라 출판 당시 출판사에서 붙히는 것이 관행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출판된 순서를 나타내는 것이지만 모든 음악가에게 첫 작품, ‘Opus 1’의 의미는 특별할 것이다. 오늘은 위대한 작곡가들의 유명한 Opus 1들을 소개한다.
로베르트 슈만(1810 –1856)
‘Abegg’ Variations, Op.1
1830년, 부모의 뜻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법학도가 되었던 스무 살의 슈만이 음악가가 되길 결심하고 작곡과 피아노에 열정을 바친다. 그리고 약 1년 후 발표된 ‘아베그 변주곡’은 스무 살의 슈만이 세상에 내 놓은 최초의 작품이 되었다.당시 그의 어머니에게 쓴 편지에는 첫 작품의 출판을 앞두고 기쁨과 기대에 차 들뜬 그의 모습이 담겨있다. 제목 ‘아베그’는 무도회에서 반한 소녀의 이름이라는 설과 가공인물이라는 설이 있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그가‘Abegg’를 a,b,e,g,g라는 다섯 음으로 풀어 곡 전체의 동기로 사용하며 암호놀이를 즐긴다는 것이다. 신선한 주제와 우아한 시정은 첫 작품에 대한 작곡가의 풋풋한 열정과 이미 완성된 독창적인 양식을 보여준다.
요하네스 브람스(1833-1897)
Piano Sonata No.1 in C major, Op.1
브람스의 초기 작품들은 그의 스승이자 든든한 후원자였던 슈만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 주었다. 1853년 슈만은 브람스의 몇몇 작품들을 접하고 1853년 <음악신보>에 “새로운 길”이라는 글을 기고하며 브람스의 천재성을 세상에 소개하였고 브람스는 단숨에 유명한 인물이 될 수 있었다. 슈만의 추천과 도움으로 악보를 출판하기에 이르렀는데, 그 첫 작품이 바로 피아노 소나타 C장조이다. 이 작품 이전에 몇몇 곡들이 더 작곡되었으나 모두 스스로 폐기처분하였고 작곡시기로 보면 다른 소나타보다도 약간 늦게 작곡된 이 곡을Opus 1으로 출판한 것에서 첫 걸음부터 완벽을 추구하고자 했던 신중한 작곡가의 초상을 본다.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1873-1943)
Piano Concerto in F# minor, Op.1
라흐마니노프가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처음 작곡하게 된 것은 그가 모스크바 음악원 학생이던 1890년 즈음이었다. 실제로 가장 먼저 작곡된 작품은 아니지만 이 협주곡으로 인해 그가 작곡가로서 처음 인정받게 되었기에 Opus 1으로 출판되었다. 하지만 스스로 이 곡에 대해 불만족스러웠던 그는 무려 27년이 지난 1917년 철저히 개작하여 다시 출판하였다. 이 때는 이미 그가 피아노 협주곡 2번과 3번을 작곡한 후였고 작곡가로서 전성기를 구가하던 때였기에 원숙하고 완성도 높은 Op.1으로 재창조되었다. 같은 해 가을, 러시아 혁명으로 가족과 함께 핀란드로 망명한 그는 후에 미국에 정착하게 되는데, 그 후 다시는 그리워하던 모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라흐마니노프의 첫 작품인 피아노 협주곡 Op.1은 그가 모국에서 완성한 마지막 곡이 된 것이다.
알반 베르그(1885-1935)
Piano Sonata, Op.1
현대음악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쇤베르그, 베번과 함께 신비엔나악파라 불리우는 베르그가 1907년에 작곡한 첫 작품, 피아노 소나타 Op.1는 역사적으로 가장 뛰어난 Op.1 중의 하나라는 평을 받는다. 그가 쇤베르그에게 음악을 배우기 전에는 정규 음악교육을 받은 적이 거의 없다는 점을 감안할 때 가히 놀랄만한 수작이라 일컫지 않을 수 없다. 한 악장으로 이루어진 이 피아노 소나타는 탄탄한 전통적 구조 위에 쇤베르그의 영향을 받은 현대적 기법의 결합을 완성시키며 일관적 주제의 변주와 발전을 이루어낸다. 작곡가의 감출 수 없는 천재성과 스승 쇤베르그에 대한 필연적 경외와 애정이 녹아 있는 작품이다.
내게 작곡가들의 첫 작품들과 대면하는 일은 언제나 흥미롭다. 그것은 마치 소설가나 미술가의 처녀작을 찾아 보는 즐거움에 비유될 수 있을까? 법학도였다가 남보다 뒤늦게 음악의 길에 들어선 후 기대감에 벅찬 슈만의 벅찬 가슴, 열정을 바친 대작을 자신의 이름으로 처음 세상에 내어 놓는 브람스의 떨리는 손끝, 서툴렀던 첫 작품의 완성도를 높히기 위해 몰두했던 고국에서의 시간을 그리워 했을 라흐마니노프의 심장, 역사를 관망하며 새로운 음악어법 탄생의 출발선상에 선 베르그의 꿈꾸는 눈…. 평소 멀게만 느껴지던 천재들의 Opus 1 속에서 우리는 어느 새 함께 울고 웃는 친구가 되어 간다. 고마운 그들의 음악에 경의를 표하며 Opus 1의 오늘을 살자,다시 나를 일으킨다.
희망의 이름이 된 피아니스트, 반 클라이번
제 13회 차이코프스키 콩쿨 소식을 듣고
2007년 07월 14일 (토) 14:31:18 | 송혜영 www.hyeyoungsong.com |
얼마 전, 러시아에서는 제 13회 국제 차이코프스키 음악 콩쿠르가 막을 내렸다. 세계 최고권위를 자랑하는 이 콩쿠르에서 한국의 임동혁군의 입상 소식을 전하는 언론들은 대부분의 입상자들이 러시아 자국민이라는 것에 대해 아쉬움과 우려 섞인 시선 또한 숨기지 않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달라스 포트워스 지역은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와는 각별한 인연이 있는 곳이라 할 수 있다. 바로 제 1회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우승하여 미국의 살아있는 전설이 된 피아니스트 반 클라이번과 그의 정신을 사랑하고 후원하는 이들이 숨쉬고 활동하는 고장이기 때문이다.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와 반 클라이번
반 클라이번(Van Cliburn, 1934~)은 루이지애나 슈리포트 태생으로 여섯 살 때 텍사스 킬고어로 이주해 왔다. 피아니스트 어머니에게 세 살 때부터 정식 피아노 레슨을 받기 시작한 그는 그 다음 해에 첫 독주회를 열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줄리어드 음악원에서 스승 로지나 레바인과 공부하면서 러시아 낭만주의의 전통을 깊이 배울 수 있었고, 이것은 자연스럽게 그를 1958년 제 1회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 출전하도록 이끈 계기가 되었다. 클라이번이 결선에서 연주한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은 현지 청중들의 열렬한 기립박수를 받았으며, 심사위원들은 따뜻한 낭만과 젊은 패기가 어우러진 그의 뛰어난 연주에 1위의 영예를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계 2차대전과 한국전쟁 직후 공산진영인 소련과 자유진영의 미국의 갈등의 골이 깊어만 가던 냉전시대, 스물 세살의 미국 청년이 소련의 콩쿠르에서 우승하였다는 것은 전세계에 많은 것을 시사한 ‘사건’이었다. 1957년 세계 첫 인공위성 스푸트닉호(Sputnik) 발사의 성공으로 한층 고무되어 있던 소련으로서는 이 행사를 통해 자국의 문화적 우수성을 과시하고자 시작부터 단단히 벼르고 있던 차였다.
클라이번의 우승은 당시 열등감과 문제의식에 빠져있던 미국의 문화적 자존심을 크게 높여 주었고, 냉전의 갈등에 메말라 가던 전세계를 향해 음악이 국가간의 사상의 차이나 정치적 구도를 극복할 수 있다는 평화와 희망의 메세지를 던졌다.
또 그가 1958년 콘드라신의 지휘로RCA 빅터 오케스트라와 녹음한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과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은 열광적인 대중의 인기를 끌며 클래식 음반으로서는 처음으로 밀리언셀러의 반열에 올랐고, 타임지는 “러시아를 정복한 텍슨(The Texan Who Conquered Russia)” 이라는 제목으로 그를 표지에 싣는 등 미국인에게 반 클라이번은 음악가 이상의 것을 상징하는 이름이 되었다.
소통과 평화의 가치를 전하며
낭만 피아노 음악의 뛰어난 해석가로 칭송받으며 활발히 활동하던 중 매너리즘에 염증을 느껴 돌연 연주계를 잠적하기도 했던 그는 현재 포트워스에 거주하며 반클라이번 협회(cliburn.org)의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를 사랑하고 후원하는 이 지역 음악애호가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만들어진 이 단체는 국제 음악 콩쿠르 개최, 젊은 음악가와 학생들을 위한 교육과 연주활동 지원, 훌륭한 음악가들을 초청하여 공연을 유치하는 일 등에 바삐 움직이고 있다.
그 중에서도 1962년부터 포트워스에서 4년마다 열리고 있는 반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는 그 명성이 널리 알려진 행사로 성장하였다. 공교롭게도 역사적으로 러시아를 비롯한 많은 동구권 피아니스트들이 이 콩쿠르에서 눈에 띄게 선전하고 있는데, 러시아 본토의 음악이 이 곳에서 연주될 때면 마치 50여년 전 러시아에서 빛나던 클라이번의 영광이 겹쳐지는 듯 텍사스 청중들은 뜨거운 환호성을 감추지 못한다. 이제 반 클라이번은 정치적으로 첨예한 갈등을 빗던 두 국가간의 높은 벽을 허물고 문화적 교류를 가능케 한 이름으로서 사회에 남겨진 몫을 기쁘게 담당하고 있다.
이 지역 음악회장을 찾을 때면 친절한 웃음의 그와 종종 마추치게 될 지 모른다. 그럴 때면 “미스터 클라이번!”하고 반갑게 인사를 건네보는 것도 좋을 일이다. 뜨거운 가슴으로 음악의 힘을 온 세계에 증명하고 역사 속에서 걸어나온 한 음악가와의 만남은 먼 길 달려 음악회를 찾아 온 고단한 발걸음들에게 주어지는 또 하나의 즐거움일 것이다.
클라라 슈만의 이야기
2007년 06월 16일 (토) 04:00:41 | 송혜영 www.hyeyoungsong.com | ![]() |
학창시절 나는 친구들과 함께 대학로에 위치한 ‘슈만과 클라라’라는 커피샵을 종종 찾곤 했다. 클래식 음악과 유명연주가들의 영상을 보여주는 그 곳은 쉴 새 없이 질주하던 내 젊음이 잠시나마 느리게 세상을 응시할 수 있었던 소중한 쉼터이자 삶의 활력소였다.
‘슈만과 클라라’라는 이 낭만적 이름의 장소에서 나는 한 위대한 작곡가와 그의 숙명적 사랑이자 음악적 영감의 원천이었던 한 여인을 머리 속에 그려 보며 홀로 깊은 상념에 잠기곤 했다. 하지만 그 당시 내게 클라라는 슈만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반쪽의 이름에 불과했었다. 지금 누군가 내게 클라라에 대해 묻는다면, 나는 그를 한 여성음악가로서의 내 모습을 역사 속에 비춰볼 수 있게 한 고마운 장본인이라고 답할 것이다.
클라라 비크
클라라 비크(Clara Wieck,1819-96)는 유명한 음악교사였던 아버지 밑에서 5살 때부터 체계적인 음악교육을 받았다. 9살 때 첫 데뷰무대를 가졌고 같은 해 직접 작곡한 피아노곡을 발표하는 등 그녀의 천재성은 놀라웠다. 그녀의 연주를 접했던 괴테, 멘델스죤, 쇼팽은 ‘신동’이라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아버지의 제자이던 젊은 작곡가 로베르트 슈만(Robert Schumann,1810-1856)과 사랑에 빠졌을 때, 그녀의 아버지는 아름답고 재능넘치는 딸을 가난한 음악지망생에게 허락하지 않았다. 3년 동안의 법적 분쟁을 통해 1840년 결국 결혼에 성공했을 때, 사람들은 그녀를 슈만의 부인이라 부르지 않고, 오히려 슈만을 클라라의 남편으로 불렀다고 한다.
진정한 파트너로서 로베르트와 클라라는 결혼생활을 통해 함께 음악을 연구하고 서로 음악적 영감을 주고 받으며 수 많은 걸작품을 만들어 냈다.
하지만 클라라의 천재적 재능에도 불구하고 당시 여성이 작곡가로서 인정받는 일은 험난했다. 1839년 그녀의 일기는 여성 작곡가로서의 고뇌를 드러내고 있다.
“나는 한 때 내가 대단한 창작력을 지녔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 생각을 떨쳐 버려야 할 지 모른다. 여성은 작곡과는 그리 잘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무도 그것을 가능하게 한 사람도 없었지 않은가. 내가 그럴 수 있을까? 내 아버지가 나로 하여금 가능하다고 믿게 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조차 너무 건방진 것일까?”
로베르트는 아내에게 작곡을 계속 권하면서 그녀를 지원하려고 했지만, 클라라가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책임을 다하면서 피아노 연주와 작곡까지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녀의 개인적 삶은 결혼을 위한 아버지와의 힘든 싸움, 남편의 정신병 발작과 사별, 그 후 일곱 자녀를 홀로 책임지면서 그 중 넷의 죽음을 그녀의 눈으로 보아야 했던 비극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불운했던 개인사와 사회적 편견의 벽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음악에 대한 열정을 결코 놓지 않았다. 클라라는 대부분의 남편의 작품들을 초연하였고 특별히 브람스와 쇼팽의 뛰어난 해석가로 높이 인정받았다.
당대의 유명한 피아니스트 리스트, 안톤 루빈스타인 등과 어깨를 겨루며 ‘피아노의 여왕’이라는 칭호를 받으며 전유럽을 정복했고, 심각한 류마티즘이 그녀를 멈출 때까지 당대 최대 레퍼터리를 소유한 연주가로서 당당히 활동하였다.
클라라가 평생을 바친 열정적인 연주활동과 음악계에 세운 업적들은 그 당시 사회에서의 여성의 지위를 생각할 때 더욱 위대한 의미를 지닌다. 서거 100주년이던 1996년 무렵 이후 작곡가로서 클라라에 대한 재평가가 더욱 활발히 이루어졌고, 그녀의 작품들은 이제 세계 곳곳의 많은 연주가들에 의해 새 생명을 얻고 있다.
클라라의 목소리
바하, 모짜르트, 베에토벤, 쇼팽…. 왜 서양음악사에 나타난 위대한 음악가들은 대부분이 남성일까라는 의문을 한 번쯤 품어 본 적이 있는 이라면 세상의 절반인 여성과 음악에 대한 관심 또한 기울여 보았을 법하다.
‘파리넬리’라는 영화를 통해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카스트라토’의 등장은 1500년대 교황청이 여성의 공연을 금지시킴으로써 작곡가들이 여성의 목소리를 가진 거세한 남성가수를 기용해야 했던 뿌리깊은 남녀차별의 역사에서 기인한다.
클라라 슈만을 비롯해 최초의 여성음악가로 알려진 힐데가르드 폰 빙엔, 난넬 모짜르트, 파니 멘델스죤과 같이 음악사에 기록된 소수의 여성음악가들은 그들이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오랜 동안 제대로 재능을 평가받지 못했다.
1880년, “여성은 음악을 작곡하기에 지나치게 감정적이고 스태미너가 부족할 뿐 아니라, 여성의 마음은 음악을 만드는데 과학적 논리를 가지 못한다.”라는 죠지 업튼(George Upton)의 말은 당시의 여성에 대한 시각을 고스란히 대변해 준다. 인간의 고귀한 문화유산이자 본질적으로 가장 자유롭고 아름다와야 할 음악의 영역에서조차 남성 우위의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은 인류의 슬픈 아이러니이다.
얼마 전 한 젊은 한국 여성 지휘자가 독일의 지휘 콩쿨에서 입상하였다는 낭보를 접하고 마음이 기뻤다. 여전히 여성 지휘자의 출현만으로도 화제거리가 되는 이 때, 참으로 기분 좋은 승전보가 아닐 수 없었다.
오늘 우리의 많은 딸들이 음악을 배우고 있다. 불과 100여 년 전 사회적 편견에 굴복하지 않고 당당히 예술혼을 불태운 클라라의 이야기를 이제 그들에게도 들려주어야 하지 않을까. 바라건대 음악을 가르치는 한 선생으로서 나는 그들이 음악을 통해 한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참된 모습과 조우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음악 안에서 새처럼 자유롭기를, 자신이 누구인지 말할 수 있고, 느끼고 생각하는 바 대로 표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무대에서 세상을 향해 당당히 울려 퍼지는 딸들의 건강하고 자유로운 목소리를 더 많이 듣게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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