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송혜영의 음악 에세이
만남의 축복, 스승의 음성을 따라
음악인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끝없는 만남과 인연의 축복이다. 스승과의 인연, 제자와의 인연, 동료와의 인연, 청중과의 인연…그 소중함과 신비스러움을 체험하는 여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장 필요할 때 가장 좋은 스승을 만나는 복을 누려온 삶에 감사드릴 때 마다, 늘 나와 함께 하는 그 분들의 음성이 귓전 가득히 울려 퍼진다.
“대가가 되어라.”
중학교 시절 교과서에 없는 클래식 명곡들을 즐겨 가르치시던 음악 선생님께서는 어느 날 베르디의 오페라의 한곡을 들려 주셨다. 그 숭고한 울림에 모두의 호흡이 잠잠해 질 때 쯤 나즈막히 중얼거리시던 한 마디. “이렇게 아름다운 음악을 사람들이 들을 수만 있다면 이 세상에 전쟁과 분쟁은 일어나지 않을텐데…” 시간이 멈춘 것 같던그 순간부터 음악은 내게 돌이킬 수 없는 소명이 되었고 운명이 되었다. 선생님은 늘 “넌 대가다. 대가에게 배워라. 대가가 되어라.”고 하시며 마치 미래를 미리 알고 계신 듯 여중생 제자를 예술가로서 극진히 대우하셨다. 그시절의 꿈을 지금까지 지키며 살아 올 수 있었던 것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믿음으로 지켜 봐 주시는 스승이계셨기 때문이었다.
“너에게 놀랄만한 좋은 일이 일어날 거야.”
미국 유학을 떠나기 전 선생님께 인사를 드리러 찾아 뵙던 날, 시내에는 교통이 마비되는 큰 폭우가 내렸다. 평소점쟎으신 선생님께서 어디서 그런 흥이 나셨던 것일까. 시간도 공간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막막하던 길 위에서 선생님은 오페라의 한 대목이라도 부르듯 목청껏 반복해 외치셨다. “비 한 번 멋있게 오는구나. 잘 될 거다, 잘 될거야. 너에게 놀랄만한 좋은 일들이 일어날거야.” 유학 떠나는 제자에게 천둥보다 번개보다 뜨거운 믿음과 용기를심어주신 스승의 마음. 인생의 세찬 비를 만날 때마다 폭풍을 뚫고 날 일으켜 세우던 그 음성이 함께 울릴 것이다.
“내 평생 오늘처럼 박수를 많이 쳐 본 적이 없다.”
나의 미국유학은 운명처럼 이루어졌다.대학원을 졸업을 앞둔 학기, 학교를 방문하신 미국 교수님께 장학생으로발탁되었고, 평소 제자들의 미래에 관한 한 자율적으로 결정하게 두시는 지도교수님께서 나에게만은 유학을 절대적으로 권유하시며 모든 절차를 손수 추진해 주신 것이었다. 그렇게 긴 세월을 미국에서 활동하다 작년 한국의한 대학의 초청독주회로 다시 선생님 앞에 서게 되었을 때, 대수술 후 부축을 받고 찾아오신 선생님은 당신 평생이렇게 박수를 많이 쳐 본적이 없다고 하시며 어린아이처럼 나를 안고 기뻐하셨다. 제자를 직접 넓은 세계로 날려 보내셨던 은사님 앞에 다시 돌아와 당신의 옛 드레스를 입고 무대에 올랐던 그 날 밤, 내게는 좀처럼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넌 분명 훌륭한 엄마가 될 거야.”
텍사스 주립대 박사 과정 시절, 학생을 가르치는 나의 수업을 평가하시던 교수님께서는 문득 날 불러 세우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말씀을 마치고도 한 동안 내 얼굴을 떠나지 않던 그 눈빛은 말보다 더 큰 확신과 용기를 담고 계셨다. 매 학기 가장 많은 우수 학생을 배출하고 내 클라스 전체를 우수학생으로 선발되게 하는 기록을 남기면서, 이것은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일이라고 아낌 없는 찬사로 나를 지지해 주시던 분이었다. 선생님이 내게심어주신 교육자로서의 신뢰와 확신은 실제로 내 삶에 음악 교육에 대한 한계를 무너뜨렸다. 세 살 아이도, 여든살 노인도, 장애인도, 수감자도 모두 나의 제자이자 스승이었다. 감옥에서 가르치던 한 수감자는 “십 년의 감옥 생활 중 당신의 수업이 내게 한 줄기 신선한 바람이었습니다.” 라는 쪽지를 내게 건네 주기도 했다. 한 사람에게 음악을 가르치는 일이 인류에 생명을 탄생시키는 일이라는 스승과의 약속이 살아 있는 한 이 길은 계속 될 것이다.
내 어머니가 즐겨 부르시던 슈베르트의 가곡 ‘보리수’는 전쟁의 상흔이 그대로 남겨진 시골 어린이들을 위해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클래식 가곡을 가르치던 한 선생님이 남기신 것이었다. 나의 은사님은 당신의 어머니께 직접피아노를 배우셨는데, 그 뒤에는 문명을 막 받아들이기 시작한 한국의 소녀에게 레셰티츠키 정통주법으로 피아노를 가르치신 한 선교사님이 계셨다. 시공을 뛰어 넘어 그 분들의 음악과 정신이 오늘 내 손끝에 흐르고 있음을생각할 때 한 없이 겸허해 질 수 밖에 없다.
이제 선생님과 같은 음악가가 되고 싶다고 눈망울을 반짝거리며 내 앞에 선 학생들 앞에 나는 다시 기억한다. 당신의 존재를 다 나누어 주고도 부디 자기 자신이 되어라 당부하셨던 스승의 음성을, 제자의 무대 뒤에서 나는 아무 공이 없다 고개 저으시던 그 마음을…
글 송혜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