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회 반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쿨의 막을 내리며
“새로운 4년의 기대와 설레임으로”
클라이번의 이름
반 클라이번(Van Cliburn, 1934~2013) 은 1958년 소련 자국의 문화적 우수성을 과시하고자 개최한 제 1회 차이코프스키 콩쿨에서 우승한 미국 피아니스트이다. 이념의 갈등이 깊어 가던 냉전시대 스물 세 살 미국 청년의 우승은 당시 문제의식에 빠져있던 미국의 문화적 자존심을 크게 높여 준 사건이었다. 이 후 반클라이번은 음악이 사상의 차이나 정치적 구도를 극복할 수 있다는 평화와 희망을 의미하는 이름이 되었다. 그를 사랑하는 이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만들어진 반클라이번협회는 1962년부터 포트워스에서 4년마다 반클라이번 국제 콩쿨을 개최하며 재능있는 젊은 피아니스트를 발굴해 후원하고 있다.
클라이번의 한국
클라이번 콩쿨 역사상 한국 피아니스트들의 활약이 이렇게 두드러진 적은 없었다. 총 30명의 참가자 중 5명의 한국연주가가 초청되고 그 중 3명이 준결선에 올라 첫 한국인 우승자가 나오기까지, 이 급격하고도 놀랄만한 쾌거는 결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일은 아닐 것이다. 2005년 양희원 양에 이어 2009년 손열음 양의 준우승은 클라이번 역사에 한국 피아니스트의 기상을 새긴 귀한 수상이었다.
지난 시상식에서 심사위원 특별상 수상자로 김다솔 군의 이름이 불리우던 순간, 좌중은 잠시의 적막과 함께 공감의 웅성거림으로 가득했다. 비록 결선에 오르지 못했지만 이미 김다솔이라는 이름은 그가 남긴 감동을 떠오르게 하는 강력한 주문이 되어 버린듯 했다. 빛나는 재능과 더불어 겸손하고 발전적인 자세를 보여준 김홍기 군의 미래도 굳게 기대하고 있다. 이 곳 언론은 한국의 음악교육을 주목하라, 한국 피아니스트에게 우승이 돌아갔다 등의 들뜬 목소리로 헤드라인을 장식했다.배스홀 높히 게양되어 있던 태극기가 그 어느 때 보다 환한 빛을 비추던 현장이었다.
클라이번의 문
세 번의 독주회와 실내악, 두 번의 협주곡을 치뤄야 하는 긴 마라톤의 관문 중에서도 특히 모짜르트 협주곡과 실내악은 연주자들 간의 적나라한 비교와 경쟁이 불가피하던 무대였다. 독주에서 두각을 나타내었던 연주자가 실내악에서 기대에 미치지 못하거나, 그 반대의 경우도 있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한편 선우예권 군은 모든 라운드에서 굴곡없이 훌륭한 연주를 들려 주었다. 다양한 음악적 면모를 드러내는 프로그램 구성도 명쾌했고 현악기에 생기를 불어 넣는 실내악 연주는 탁월했다. 재능과 더불어 겸손과 깊은 성찰력을 겸비한 그에게 클라이번이 더 넓은 음악적 세계로의 열린 문이 되어 주리라는 것을 확신한다. 클라이번의 가치와 기대를 빛낼 훌륭한 우승자를 선택해 낸 심사위원들에게도 축하의 박수를 보내며…
클라이번의 유산
마지막 연주를 마친 케네스 브로버그의 뺨을 자랑스럽게 어루만지는 스승은 11 회 클라이번 우승자 스타니슬라프 유데니치이다. 브로버그의 창조적 보이싱, 빛을 섞어 제조한 듯한 음색, 감성과 타성에 잠식되지 않는 꿈틀거리는 창조자적 시선은 20 여년 전 유데니치의 연주와 놀랍도록 닮아 있다.
심사위원특별상을 수상한 레오나르도 피에르도메니코의 스승이 8회 동메달 입상자 베네데토 루포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을 때, 비로소 그의 특별하고 아름다운 음색의 비밀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음악을 위해 연주하는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다던 젊은 시절의 루포. 비록 메달을 받지 못했지만 오직 음악을 위해서 연주한 제자를 자랑스러워 할 그의 모습이 생생히 겹쳐졌다. 누군가에게서 누군가에게로 전해지는 음악, 세대를 거쳐 전달되는 따뜻함의 유산들이 클라이번이라는 바다로 함께 흘러가고 있다.
프레스룸에서
결선을 앞두고 유럽과 타주에서 모여든 취재진들과 비평가들로 붐비는 클라이번의 프레스룸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흐른다. 그 곳은 한국 젊은이들의 월등한 재능에 비해 우리의 관심과 후원이 부족한 현실을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 미안한 마음과 자긍심으로 유일한 한국 관계자로서 끝까지 함께 했고 감격스러운 피날레까지 선물 받았다.
심사위원의 마음을 가졌거나 그렇지 못 했거나, 눈물을 흐르게 하고 심장을 뛰게 한 모든 피아니스트들에게 진심어린 감사와 행운을 보낸다. 그대들에게 과감한 음악적 탐사가 주어지기를, 음악과 삶이 함께 무르익는 시절을 만끽하기를…새로운 4년의 기대와 설레임은 이미 시작되었다.
글 송혜영
피아니스트, 음악박사